바콜로드, ‘시티 오브 스마일’이라 불리는 필리핀 서부 네그로스 섬의 조용한 도시. 이곳을 방문한 이유는 마스카라 축제도, 해변도 아니었다. 나는 오직 한 가지를 위해 이곳에 왔다. 바로 ‘Inasal(이나살)’이라는 이름의 닭구이.
공항에 내리자마자 택시 기사에게 말했다. “가장 맛있는 Inasal 파는 데로 데려다주세요.” 그는 미소를 지으며, 흔들리는 길을 따라 나를 'Manokan Country'라는 허름한 노점 밀집 지역으로 안내했다.
닭고기의 연기를 머금은 공기, 타는 나무 석탄의 향, 그리고 수십 개의 작은 철판 테이블. 나는 그날, 10년 넘게 운영 중이라는 한 노점 앞에 앉았다. 그리고, 인생 닭 한 점을 만났다.
숯불 위의 향기와 마리네이드의 조화
Inasal은 겉보기엔 단순한 숯불 닭구이다. 하지만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그 편견은 무너진다.
닭고기는 간단해 보이지만, 식초, 칼라만시(필리핀 라임), 마늘, 생강, 레몬그래스, 그리고 아추엣 오일(아나토 씨에서 추출한 오일) 등으로 마리네이드되어 있었다.
겉면은 숯불에 살짝 그을려 바삭했고, 속은 촉촉했다. 익히는 중간중간 노란 오일을 붓는 장면은 마치 의식 같았고, 그 오일 덕분에 고기에는 은은한 향과 유분이 돌았다.
가장 놀라운 건, 닭가슴살 부위조차도 전혀 퍽퍽하지 않았다는 것. 젓가락을 대는 순간 결대로 부드럽게 찢어졌고, 씹자마자 즙이 퍼졌다.
밥 없이 Inasal을 먹는 건 반칙
같이 나온 건 마늘볶음밥(Garlic Rice), 그리고 식초-피쉬소스-고추를 섞은 양념장이었다. 밥 위에 노란 기름을 한 스푼 얹고, 손으로 닭을 찢어 올린 뒤, 식초 양념을 살짝 뿌려 먹었다. 그 맛은 표현이 안 된다. 그냥 행복했다.
필리핀 음식 중 드물게 칠리 없이도 충분히 매력적이었고, 소금기가 강하지 않아 누구에게나 부담 없이 어필할 수 있을 맛이었다.
노점의 플라스틱 테이블, 철제 접시, 맥주 캔 하나와 함께한 그 식사는 값비싼 레스토랑 부럽지 않았다.
바콜로드에서 마닐라로, 마닐라에서 세계로
Inasal은 본래 바콜로드 및 일로일로 지역에서 시작된 지방 음식이다. 하지만 그 인기가 커지면서 Jollibee 자회사인 'Mang Inasal' 체인으로 전국에 퍼졌고, 지금은 해외에도 진출했다.
하지만 진짜 Inasal을 먹기 위해선, 여전히 바콜로드에 와야 한다는 게 현지인의 말이다. 현지 숯, 지역 닭, 생 아나토 오일, 그리고 거리의 공기. 그 모든 요소가 모여야만 진짜 Inasal이 완성된다는 것이다.
왜 이 음식은 특별했을까?
그날의 Inasal은 내게 필리핀이라는 나라가 주는 또 다른 얼굴이었다. 한국식 양념치킨과도, 서양식 로스트치킨과도 다른 그 맛은, 담백하고 순수하면서, 동시에 강렬했다.
그 맛에는 어떤 '애씀'이 들어 있었다. 잘 구워야 한다는 조심스러움, 불의 온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솜씨, 그리고 무엇보다, 손님을 만족시키기 위한 정성이 담겨 있었다.
돌아오는 길, 택시 창밖으로 다시 Manokan Country가 보였다. 나는 마지막으로 창문을 내리고 그 냄새를 깊이 들이마셨다. 그건 단순한 닭냄새가 아니라, 바콜로드의 기억이었다.
그날의 Inasal은 내 여행의 절정이었고, 내게 '닭고기 하나가 이렇게도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걸 처음 알려준 한 접시였다.
'동남아 나라별 음식 > Philippin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Bibingka – 성탄의 냄새로 기억된 쌀 케이크 (0) | 2025.05.15 |
---|---|
Sisig (2) – 바삭한 철판 위에서 튀어 오른 소리, 그리고 첫 충격 (1) | 2025.05.15 |
Tocino – 아침 햇살에 구운 달콤한 필리핀의 시작 (0) | 2025.05.15 |
Bicol Express – 불 위의 코코넛, 필리핀에서 가장 매운 사랑 (0) | 2025.05.14 |
Halo-Halo – 모든 것을 섞었기에 완성되는 필리핀의 여름 (0) | 2025.05.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