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 나라별 음식/Philippines 16

검은 먹물 속의 깊은 맛, Adobong Pusit 체험기

마닐라 출장 셋째 날 밤이었다. 하루 종일 이어진 회의와 도로 정체 속에서 지친 몸을 이끌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 현지 파트너가 말했다. “오늘은 특별한 아도보를 먹어볼래요?” 아도보는 이미 여러 번 먹었기에 시큰둥했지만, 이어지는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오징어 아도보, 먹물로 조리된 거예요.”그 이름은 Adobong Pusit. 그날 밤, 내가 필리핀 음식에 대해 갖고 있던 이해의 폭이 한 층 더 넓어지게 된 순간이었다.---Adobong Pusit이란?'Adobo'는 필리핀의 대표적인 조리법으로, 간장, 식초, 마늘, 후추, 월계수잎을 이용해 고기나 해산물을 졸이는 방식이다. 일반적으로는 돼지고기나 닭고기로 만들지만, 해산물 중 오징어(Pusit)를 주재료로 한 이 ‘Adobong Pusit’은 ..

Kwek-Kwek – 주황빛 튀김옷 아래 숨어 있는 거리의 유쾌함

바삭. 쩝. 아삭. 마카티의 오후, 사무실 구석 테라스에서 누군가가 튀김을 먹는 소리가 났다. 다소 고소하면서도 묘한 냄새가 코를 찔렀고, 나는 미소를 지은 채 밖으로 나왔다. 길가 노점에는 작은 튀김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그 옆에 빨간 소스, 갈색 소스, 그리고 투명한 식초가 준비돼 있었다.친구가 권한 건 바로 'Kwek-Kwek'. 필리핀의 대표 길거리 간식이다.Kwek-Kwek은 삶은 메추리알에 오렌지색 튀김옷을 입혀 바삭하게 튀긴 간식이다. 튀김옷은 밀가루와 전분, 식용 색소(보통 아나토 오일로 만든다)를 섞은 반죽으로 만든다. 튀김 후엔 종이컵에 담아 주고, 여기에 각자 소스를 골라 뿌려 먹는다.한 입 베어 물면, 겉은 뜨거울 만큼 바삭하고, 속은 부드럽고 고소하다. 메추리알 특유의 감칠맛..

Bibingka – 성탄의 냄새로 기억된 쌀 케이크

12월 중순, 필리핀 마닐라의 새벽은 의외로 서늘했다. 한 해의 끝자락, 도시 곳곳엔 성탄 분위기가 가득했고, 나는 현지 친구의 권유로 새벽 미사인 ‘Simbang Gabi’에 함께 하게 되었다. 종소리가 울리고, 사람들은 하나둘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의식이 끝나고 나왔을 때, 공기 속에는 묘한 냄새가 퍼져 있었다. 단맛과 불향이 섞인 그 냄새는 어느 노점상에게로 발길을 이끌었다.그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Bibingka’를 마주했다. 종이 접시 위에 바나나잎이 깔려 있었고, 그 위엔 반쯤 부푼 케이크 같은 노란 떡이 담겨 있었다. 표면엔 강판에 간 치즈와 코코넛, 삶은 오리알 반쪽이 얹혀 있었고, 바닥은 불에 직접 닿아 살짝 탄 듯한 자국이 남아 있었다.첫 한입. 부드러우면서도 고소했고, 단맛이 은은했..

Sisig (2) – 바삭한 철판 위에서 튀어 오른 소리, 그리고 첫 충격

마닐라에서 북쪽으로 몇 시간, 팜팡가 지방의 수도 앙헬레스 시티에 도착했을 때, 나는 단 하나의 음식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 이름은 ‘Sisig(시시그)’. 필리핀식 술안주라지만, 단순히 그걸로 정의할 수 없는 깊은 맛의 요리.길거리에 들어서자마자 코끝을 때리는 향. 불판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찢긴 고기들의 기름 튐 소리. 그리고 그 위에 깨지듯 놓이는 날계란 하나.나는 ‘Aling Lucing’이라는 작은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Sisig의 발상지라고 불리는 이곳에서, 나는 첫 시식을 경험하게 되었다.머릿살, 귀, 간까지… 돼지의 모든 것을 바삭하게Sisig은 돼지 머릿살, 귀, 때론 간까지 잘게 다져 만든 요리다. 원래는 버려지던 부위를 활용하던 것이, 지금은 필리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철판 요..

Inasal – 바콜로드의 숯불 향이 담긴 닭고기, 기억에 남은 한 점

바콜로드, ‘시티 오브 스마일’이라 불리는 필리핀 서부 네그로스 섬의 조용한 도시. 이곳을 방문한 이유는 마스카라 축제도, 해변도 아니었다. 나는 오직 한 가지를 위해 이곳에 왔다. 바로 ‘Inasal(이나살)’이라는 이름의 닭구이.공항에 내리자마자 택시 기사에게 말했다. “가장 맛있는 Inasal 파는 데로 데려다주세요.” 그는 미소를 지으며, 흔들리는 길을 따라 나를 'Manokan Country'라는 허름한 노점 밀집 지역으로 안내했다.닭고기의 연기를 머금은 공기, 타는 나무 석탄의 향, 그리고 수십 개의 작은 철판 테이블. 나는 그날, 10년 넘게 운영 중이라는 한 노점 앞에 앉았다. 그리고, 인생 닭 한 점을 만났다.숯불 위의 향기와 마리네이드의 조화Inasal은 겉보기엔 단순한 숯불 닭구이다...

Tocino – 아침 햇살에 구운 달콤한 필리핀의 시작

마닐라의 아침, 거리에는 마늘 볶음밥 냄새가 퍼지고, 주방에서는 작은 팬에서 무언가 지글거린다. 바로 Tocino, 필리핀 사람들이 사랑하는 달콤한 돼지고기다.현지 지인의 집에 초대받아 처음 맛본 그날, 나는 그 특유의 향기에 놀랐다. 설탕과 파인애플 주스로 재운 고기는 살짝 탄 듯한 겉면과 부드러운 속살을 동시에 품고 있었고, 마늘 볶음밥, 반숙 계란, 식초 소스를 곁들인 ‘Tosilog’ 한 접시는 아침부터 입맛을 깨웠다.달콤한데 느끼하지 않고, 고기인데 부담스럽지 않은 이 아침은 마치 필리핀의 정서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했다.Arroz Caldo – 병든 몸도, 지친 마음도 안아주는 닭죽 한 그릇비 오는 마닐라의 오후, 몸이 으슬으슬했던 날, 지인이 “이럴 땐 Arroz Caldo지”라며 데려간 곳..

Bicol Express – 불 위의 코코넛, 필리핀에서 가장 매운 사랑

한입만 먹어도 입안이 얼얼하다. 그러나 수저는 다시 국물로 향한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젓가락을 멈출 수 없는 매력. 그게 바로 **비콜 익스프레스(Bicol Express)**다.이 음식은 필리핀 남부의 정열을 닮았다. 맵고, 뜨겁고, 부드럽고, 자극적이다.---비콜 익스프레스란?Bicol Express는 코코넛 밀크에 칠리와 바고옹(새우 페이스트), 돼지고기를 넣고 졸인 매운 스튜다.비콜 지역에서 유래한 요리로, 고추를 아낌없이 넣어 ‘필리핀에서 가장 매운 요리’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주재료: 돼지고기(보통 삼겹살), 그린 칠리, 코코넛 밀크, 바고옹(또는 간장)보조 재료: 마늘, 양파, 생강, 약간의 설탕---이름의 기원과 흥미로운 배경이 요리의 이름은 의외로 철도 노선 이름에서 따왔다.1970년..

Halo-Halo – 모든 것을 섞었기에 완성되는 필리핀의 여름

한여름 필리핀 거리. 땀이 목을 타고 흐르고, 거리에는 열대 과일 향과 볶은 마늘 냄새가 뒤섞인다.이때, 누군가 손에 든 컵 안에 하얀 얼음, 보라색 우베, 노란 바나나칩, 붉은 젤리, 연유가 어우러진 무지개 같은 디저트가 보인다.그 이름은 할로할로(Halo-Halo). 필리핀의 가장 상징적인 여름 디저트다.---할로할로란?Halo-Halo는 필리핀어로 “섞는다”는 뜻의 halo에서 유래했다. 이름 그대로, 이 디저트는 다양한 재료를 한 컵에 가득 담아, 완전히 섞어서 먹는 방식이다.무더운 필리핀 여름에 시원하고 달콤한 위로를 주는 이 음식은 얼음 빙수이자, 문화적 혼합의 상징이다.---구성 요소 (지역과 가정에 따라 달라짐)기본 재료:곱게 간 얼음증류 우유 또는 연유우베(보라색 고구마) 아이스크림 또는..

Pancit Palabok – 황금빛 소스에 얹은 필리핀의 면 문화 축제

잔칫집이 열리면 빠지지 않는다. 환갑잔치, 졸업 파티, 회사 창립 기념일, 그리고 어린아이의 첫 돌까지.필리핀의 축제 식탁 한가운데엔 언제나 밝은 주황빛의 국수가 있다.땅콩, 마늘, 새우, 달걀, 비스켓 크럼이 흩뿌려진 복잡하고 화려한 면 요리. 그 이름은 바로 **판싯 팔라복(Pancit Palabok)**이다.---판싯 팔라복이란?Pancit Palabok은 **얇은 쌀국수(Bihon)**에 새우 기반의 오렌지빛 소스, 각종 토핑을 얹은 필리핀식 국수 요리다.Pancit은 중국어에서 유래한 '면(麵)'이라는 단어이며, Palabok은 **‘장식’ 또는 ‘장식이 화려한 것’**을 의미한다.즉, Palabok은 단순한 국수 요리가 아니라, **풍성한 토핑과 색감으로 꾸며진 ‘보이는 축제’**다.---유래..

Laing – 타로 잎으로 감싼 불의 부드러움, 필리핀 비콜의 정수

코코넛 밀크가 천천히 끓고 있었다. 그 속에는 말린 타로 잎이 조심스레 담겨 있었고, 그 위로 붉은 칠리 조각들이 살포시 흩어졌다.아무 말 없이 뜨끈한 밥 옆에 놓이면, 한 숟갈로도 마음이 순해지는 그런 음식. 그게 바로 **라잉(Laing)**이다.---라잉이란?Laing은 코코넛 밀크와 칠리, 마늘, 말린 타로 잎을 끓여 만드는 필리핀 비콜(Bicol) 지방의 전통 요리다.본래는 육류가 전혀 들어가지 않은 순수 채소 요리였지만, 현대에는 건새우, 오징어, 돼지고기를 약간 넣는 방식도 흔히 볼 수 있다.끓이면 끓일수록 더 부드러워지고, 진해지는 국물. 그리고 그 속에 풍덩 담긴 타로 잎의 촉감은 실크보다 더 부드럽다.---유래와 지역적 뿌리필리핀 남부 **비콜 지역(Bicol Region)**은 화산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