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끼의 기억 8

한끼의 기억 8 - (미얀마) 코코넛 닭국수 속에 녹아든 초대의 마음

양곤에서의 마지막 날, 일정은 갑작스럽게 비었다.원래 예정된 업체 미팅이 취소되면서, 오후부터 호텔방에 혼자 갇혀 있었다.창밖으로는 더운 바람과 오토바이 경적만 들렸고,낮잠도, 메일도, 방 청소도 이상하게 진이 빠져 더 할 수 없었다.그때였다.며칠 전 만난 현지 파트너 나잉(Naing)이 연락해왔다.“혼자 계시면, 저녁에 우리 집으로 오세요. 아버지가 요리하셨어요.”갑작스러운 초대였지만, 나는 두말 없이 택시를 불렀다.아무런 약속 없는 오후보다, 초대받는 따뜻한 저녁이 더 사람을 살게 했으니까.나잉의 집은 양곤 외곽의 조용한 주택가에 있었다.벽돌로 지은 2층집, 발코니에는 아이들의 작은 운동화들이 말라 있었다.집 안에서는 양파를 볶는 소리와, 코코넛 밀크 특유의 달콤한 향이 흘러나왔다.“오늘은 Ohn N..

한끼의 기억 2025.05.27

한끼의 기억 7 - (싱가포르) 피시헤드 커리 앞에서 비로소 열린 마음

싱가포르 출장은 항상 분 단위로 흘러갔다.공항에서 호텔, 호텔에서 미팅룸, MRT, 엘리베이터, 그리고 다시 이메일.그 도시의 완벽한 질서에 익숙해진 지 오래였고,나는 싱가포르를 ‘효율’로만 기억했다.그날도 그랬다.오전 미팅은 예정보다 일찍 끝났고, 현지 파트너와의 저녁 약속까지 애매하게 시간이 비었다.그러던 중, 현지 직원 린이 물었다.> “피시헤드 커리, 드셔보셨어요?”나는 속으로 ‘생선 머리를 먹는다고?’ 하고 생각했지만, 겉으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린은 나를 데리고 리틀인디아의 한 허름한 식당으로 향했다.형광등 불빛 아래 스틸 테이블, 벽엔 카다멈과 정향 그림이 붙어 있었다.주문은 간단했다.피시헤드 커리, 스팀 라이스, 라씨.얼마 지나지 않아 그 커리가 나왔다.커다란 금속 냄비에 담긴 붉은 커..

한끼의 기억 2025.05.27

한끼의 기억 6 - (말레이시아) 밤기차를 놓친 날, 마막에서 만난 새벽의 로띠 차나이

쿠알라룸푸르 센트럴 역은 늘 정신없다.플랫폼에는 인도계 여성이 아이를 달래며 앉아 있고,비닐가방을 든 말레이 아저씨들이 땀을 닦으며 전화기를 붙들고 있다.나는 오후 회의를 마치고 야간 열차를 타고 이포로 향할 계획이었다.그러나 도착했을 땐 플랫폼이 이미 텅 비어 있었다.표를 보며 확인하니 9시 30분이었다.기차는 정확히 9시 정각, 떠났다.배낭을 내려놓고 플랫폼 벤치에 앉았을 때, 허탈함보다 먼저 찾아온 건 공복이었다.이른 점심을 먹은 후 회의에 매달린 터라,오후 내내 속이 허했다.숙소로 돌아가기엔 너무 멀었고, 택시도 마땅치 않았다.그러다 역사 건너편에서 환하게 불을 밝힌 노란 간판이 보였다.“Restoran Nasi Kandar & Mamak Food 24 Hours”낮에는 지나쳤던 흔한 마막 식당...

한끼의 기억 2025.05.27

한끼의 기억 5 - (태국) 푸켓, 귀신을 보고 놀란 다음날의 해산물 한 상

출장 막바지, 푸켓에서의 하룻밤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예산이 빠듯해 고른 호텔은 바닷가에서 멀지 않았고, 외관도 깔끔했지만 어딘가 기묘하게 조용했다.밤 11시 무렵,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웠는데 천장에서 계속 무언가 “툭, 툭”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잠결에 눈을 뜨고 천장을 올려다본 순간—거기엔 누군가, 분명히 사람의 형체가 서 있었다.지금도 그게 진짜였는지, 꿈이었는지 알 수 없다.하지만 분명한 건, 나는 밤새 불을 켠 채로 잠들지도 못하고, 새벽녘이 되어서야 지친 몸을 침대에 눕혔다는 사실이다.다음날 아침, 푸켓의 화창한 햇살 속에서도 나는 어딘가 얼어 있었다.머리카락은 눅눅했고, 입맛은 없었고, 심장은 아직도 어제 밤을 되새기는 듯 두근거렸다.그러다 현지 친구 놈(Nom)이 전화를 걸어 말했다...

한끼의 기억 2025.05.27

한끼의 기억 4 - (필리핀) 보홀섬, 아무 일도 없던 저녁의 완벽한 식사

보홀섬에 도착한 날은 어떤 일정도, 어떤 목적도 없었다.그저 ‘쉬고 싶다’는 생각 하나로 정리한 출장 뒤의 짧은 휴식.오랜만에 스마트폰을 멀리하고, 슬리퍼를 신고 걷는 해변의 모래는딱 내가 원했던 느긋함 그 자체였다.그날 오후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루복 강을 따라 작은 배를 타고 흐르듯 다녔고,돌아와 해변에 앉아 노을이 코코넛 나무 너머로 지는 걸 바라봤다.배는 슬슬 고팠지만, 마트도, 배달앱도 없던 그 섬에서는‘배고픔을 감각적으로 기다리는 것’조차 하나의 경험이었다.해가 완전히 사라졌을 무렵,현지인 집 앞에 놓인 작은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Lutong Bahay – Home-cooked Meals”집밥. 그 단어는 너무도 따뜻하게 다가왔다.대문을 밀고 들어가니 앞마당에 작은 테이블 네 개,모기..

한끼의 기억 2025.05.27

한끼의 기억 3 - (인도네시아) 관광객들 사이의 정장아저씨 하나

발리는 늘 ‘환대’의 섬이라 불리지만, 이상하게 그날 나는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한 기분이었다.업무 미팅 일정 때문에 깔끔한 정장에 로퍼까지 갖춰 신은 나는,호텔 투숙객들 사이에서 눈에 띄는 이방인이었다.모두 반바지에 샌들, 선크림을 바른 채 수영장에서 칵테일을 마시는 분위기.그 속에서 나는 슬리퍼도, 선글라스도 없이투박한 서류 가방을 품에 안고 레스토랑에 들어섰다.직원은 친절했지만, 그 친절함 속에도 어딘가 ‘이 사람은 여행자가 아니군요’ 하는 묘한 거리감이 배어 있었다.하긴, 누가 저녁 여덟 시 발리에서 혼자 정장 입고 밥을 먹는단 말인가.메뉴를 건네받고도 한동안 아무것도 고르지 못했다.그러다 페이지 가장 하단에 적힌 **“Bebek Betutu – Slow-roasted Balinese duck wi..

한끼의 기억 2025.05.27

한끼의 기억 2 - (베트남) 전기쇼크 후, 놀란 가슴을 달래준 붉은 국수 한그릇

호찌민의 여름은 선풍기로도, 미간을 찡그리는 표정으로도 막을 수 없는 끈적임이다.그날도 마찬가지였다.새로 입주한 아파트에 에어컨 실외기를 매립 설치하다가, 전선 끝 단자를 헛짚었다.순간 번쩍하고, 손끝이 얼얼했다.전류는 몸을 훑고 지나갔지만, 이상하게 가슴이 먹먹해졌다.크게 다치진 않았지만, 머릿속이 뿌옇고, 목덜미가 끈적하게 식은 땀으로 젖었다.곁에 있던 현지 기사 탄이 아무 말 없이 나를 부축해 오토바이를 탔다.비가 내리고 있었다. 얇은 비옷을 입은 우리 둘은 오래된 골목길을 달려,정육점과 차 수리점 사이의 허름한 식당 앞에서 멈췄다.“Chỗ này ăn ngon.” (여기, 맛있어요.)작은 플라스틱 문을 열고 들어가자 고소한 냄새가 안경을 흐리게 만들었다.뿌연 증기 속에서 아주머니가 큼직한 냄비를 ..

한끼의 기억 2025.05.27

한끼의 기억 1 - (태국) 장사는 안되어도 밥은 제대로

방콕의 더운 공기는 에어컨 사업자에게 호재였지만, 이상하게도 그해 여름은 뭔가 어긋난 느낌이었다.거래선을 만나기 위해 방콕 시내의 교외에 위치한 창고형 쇼룸을 몇 군데 들렀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차가웠다.환율이 좋지 않다는 말, 재고가 쌓여있다는 핑계, 어차피 기존 브랜드를 고수하겠다는 선언.어느 쪽도 내게 희망을 주지 않았다. 말 그대로, 장사가 안 되는 날이었다.한참 허탈하게 앉아있을 때, 늘 말 수 없던 현지 거래선 사장 ‘솜차이’가 말했다.“Chris, you look tired. Let’s eat. No business today. Just eat well.”그 말이 이상하게 가슴에 박혔다.장사 얘기는 잠시 접고 밥이나 잘 먹자니, 그건 위로이면서도 일종의 체념처럼 들렸다.그가 데려간 곳은 번화..

한끼의 기억 2025.05.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