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ian Food Anthology 67

한 음식을 따라 걷는 여정 – 동남아 국경을 넘은 맛의 경로

하나의 음식이 하나의 장소에만 머무는 시대는 끝났다. 동남아에서는 특히 그렇다. 쌀국수 한 그릇, 바삭한 튀김 하나, 매운 소스 한 방울이 국경을 넘고, 섬을 지나고, 언어와 종교를 건너며 다른 얼굴을 갖는다. 나는 그런 음식을 따라, 다시 여행을 시작한다.이번엔 '음식'이 아니라, 그 음식이 건너온 경로에 집중한다. 누가 들고 왔고, 어디에서 어떻게 바뀌었는지. 그 흐름을 따라가면, 지도에는 없던 미각의 국경선이 드러난다.---시작은 베트남 – ‘짜조’의 첫 걸음베트남의 북부 하노이에서 태어난 짜조(Chả giò). 돼지고기, 당면, 목이버섯, 당근을 쌀종이로 감싸 튀겨낸 바삭한 만두다. 뗏 명절마다 어머니와 딸이 함께 만드는 요리로, **‘가족의 손맛’**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이 음식이 국경..

국경을 건너온 국물 – 동남아 이웃 나라 음식, 그 낯선 반가움

출장을 다니며 하나 확실히 배운 게 있다.동남아의 국경은 느슨하지만, 식탁 위에선 아주 강렬하다.한 나라의 음식을 다른 나라에서 마주쳤을 때, 나는 늘 같은 두 가지 감정을 느낀다. “반갑다”와 “어, 왜 이래?”낯익은 이름의 음식이 낯선 나라에서 내 앞에 놓였을 때, 나는 그것이 누군가의 기억을 타고 국경을 넘었다는 것을 직감한다. 그리고 그 음식은 원조의 맛을 살짝 비틀고, 현지의 향신료를 얹고, 다른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음식을 통한 작은 문화 충돌이자 대화다.---하노이 골목에서 만난 팟타이 – 마늘과 고수 사이의 균열하노이 출장 셋째 날, 더운 바람을 피해 들어간 골목 식당. 벽엔 ‘Pad Thai’라는 붉은 글씨가 걸려 있었다.“여기서 팟타이를?”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시켰다.나온 요리는 이..

노란 깃발 아래의 침묵 – 태국 제(เจ) 음식 축제와 채식 철학

푸껫의 아침은 낯설고도 아름답다. 바닷바람이 스치는 거리에는 노란 깃발이 나부끼고, 그 위엔 붉은 글씨로 ‘เจ(Je)’라 적혀 있다. 평소엔 고기 굽는 연기와 삼발 냄새로 가득한 골목이지만, 이 시기만큼은 정적에 가까운 고요가 도시를 감싼다. 고기 대신 콩 단백이, 생선 대신 두부가, 강한 향 대신 맑고 부드러운 국물이 식탁에 오른다. 이건 단순한 음식의 변화가 아니다. 몸과 마음을 정화하기 위한 침묵의 수행이다.태국 남부를 중심으로 매년 열리는 Tesagan Gin Je (เทศกาลกินเจ), 즉 태국의 제 음식 축제는 단순한 채식 캠페인이 아니다. 이 축제는 태국에 뿌리내린 중국계 이민자들의 대승불교와 도교 사상이 만난 곳에서 시작되었다. 특히 푸껫의 화교 사회에서는 오래전부터 이 시기를 ‘정결..

히잡 너머의 부엌 – 동남아 이슬람 음식 문화의 일상과 은밀함

동남아에서 이슬람은 종교를 넘어 생활 방식이자 요리 철학이다.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브루나이, 싱가포르 일부, 태국 남부, 필리핀 민다나오 지역에 이르기까지 히잡을 쓴 여인들의 부엌은 언제나 할랄의 원칙을 따르면서도, 은밀하게 풍성하고 창의적이다.금기의 테두리 안에서 만들어지는 무한한 변주는, 오히려 더 깊고 넓은 요리 세계를 만든다. 이슬람 음식 문화는 동남아의 고유한 향신료와 풍토, 여성의 손끝을 통해 엄격함과 자유로움이 공존하는 밥상을 펼쳐낸다.---말레이시아 – 할랄의 정중함, 삼발의 강렬함쿠알라룸푸르에서 시작되는 말레이식 아침은 ‘나시 르막’이다. 코코넛 밀크 밥, 삼발, 땅콩, 멸치, 삶은 달걀. 모든 재료는 할랄 인증을 거친다.하지만 그 조합은 상상보다 자유롭다. 중식 스타일의 치킨을 올..

국경 없는 냄비 – 화교와 동남아 음식의 교차점

동남아를 여행하다 보면, ‘중국 같은데 중국이 아닌’ 음식들을 만나게 된다. 기름향은 나지만 맛은 더 달고, 볶음은 빠르지만 국물은 깊다. 짜장은 없고, 완자는 있지만 피쉬소스가 더해진다. 그것은 바로 화교 음식의 흔적이다.화교는 단지 상인이 아니었다. 그들은 냄비를 든 이주민이었고, 조리도구와 언어, 가족식사의 리듬을 들고 남중국해를 건넜다.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태국, 인도네시아. 그들의 음식은 도착한 땅의 맛과 섞이며, 전혀 다른 정체성을 만들어냈다. 화교 음식은 정착과 융합의 맛이다.---말레이시아 – 노냐 요리, 두 혈통의 접합페라나칸 또는 노냐 음식은 말레이 여성과 중국 남성의 결혼에서 시작됐다. 이 음식은 중국식 조리 방식에 말레이 향신료와 코코넛 밀크가 더해져 탄생했다.파인애플 커리, 락..

어머니의 손맛 – 기술 이전의 기술

기계가 요리를 대체할 수 있다고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어느새 사람들은 다시 묻는다. “이건 왜 집에서 먹던 맛이 안 날까?” 그리고 그 대답은 늘 같다. 어머니의 손맛. 그것은 계량할 수 없고, 반복도 어렵고, 공식화되지 않지만, 한 번 혀에 닿으면 절대 잊히지 않는 감각이다.동남아의 전통 음식 대부분은 이름 없는 여성들의 손을 거쳐 살아남았다. 레시피는 없고, 눈대중과 손끝 감각만이 있었다. 그 손은 가족을 살렸고, 공동체를 지켰으며, 지금도 음식의 기원을 기억하는 살아 있는 레시피 북이다.---태국 – 손끝으로 간 맞추는 똠얌꿍한 숟가락을 떠보고, 고개를 갸우뚱한 후 라임을 반 조각 더 짜넣는 어머니. 똠얌꿍의 맛은 간장의 비율이 아니라 그날 가족의 입맛에 맞춘 손의 조정에서 나온다.기계는 ..

불 위의 기억 – 돌아오는 동남아 전통 조리기구들

스테인리스, 에어프라이어, 전기포트가 주방을 지배한 시대였다. 하지만 요즘, 동남아의 일부 가정과 레스토랑, 카페와 푸드 콘텐츠 속에서 다시 등장하는 것이 있다. 바로 전통 조리기구다. 무겁고 불편하며 오래 걸리지만, 그 기구들이 만들어내는 맛은 다르다. 맛에는 도구의 리듬이 있다. 그리고 지금, 그 리듬이 돌아오고 있다.---태국 – 모라딘(흙냄비)의 부활태국 북동부에서는 찜, 카레, 국물 요리를 할 때 **모라딘(Mor Din)**이라는 흙냄비를 썼다. 이 냄비는 불 위에서 천천히 뜨거워지고, 음식의 수분을 천천히 빼앗는다. 최근 치앙마이의 슬로우푸드 셰프들과 도예가들이 협업해 이 전통 냄비를 다시 만들기 시작했다.“플라스틱 향이 섞이지 않고, 뚜껑이 열릴 때 나는 향이 너무 다르다.” 그건 기계가 ..

천천히, 깊게, 오래 – 동남아의 슬로우푸드 운동

패스트푸드가 지배하던 시절이 있었다. 동남아의 대도시도 예외는 아니었다. 매끈한 포장, 5분 안에 나오는 요리, 30초 영상에 최적화된 음식. 하지만 그 속도에 피로한 사람들이 다시 느림의 밥상을 향해 돌아서고 있다.슬로우푸드, 한때 유럽의 미식 운동으로 여겨졌던 이 개념이 이제는 동남아에서 기억과 정체성의 회복 도구로 진화하고 있다. 이건 단지 요리법이 아니라, 태도이자 선택의 문제다.---태국 – 똠카와 똠얌, 국물의 시간을 되찾다똠얌꿍과 똠카까이처럼 향신료가 풍부한 태국 국물 요리는 원래 오랜 시간 우려내야 제맛이 난다. 하지만 패스트푸드 시스템에선 분말스프와 인스턴트 향료가 자리잡았다.그러나 최근 젊은 셰프들과 푸드 콘텐츠 크리에이터들이 다시 가정식 똠얌의 복원을 주도하고 있다. 그들은 말한다. ..

재래시장의 르네상스 – 동남아 전통의 심장이 다시 뛴다

한때 낡고 혼잡하고 불편하다고 여겨졌던 재래시장이 돌아오고 있다. 동남아 각국의 젊은 세대들이 이 오래된 공간에 다시 모여들고 있다. 맛의 원형, 사람의 온기, 시간의 흐름을 그대로 간직한 공간. 재래시장은 이제 더 이상 '과거'가 아니다. 그것은 살아 있는 문화 플랫폼이자, 전통을 먹는 장소로 재탄생하고 있다.---태국 – 짜뚜짝이 아니라, 딸랏 플루방콕의 딸랏 플루(Talat Phlu)는 한때 고령자와 서민들의 공간이었지만, 이제는 브런치 카페보다 더 붐비는 핫플이 되었다. 젊은이들이 모여 이산식 소시지, 코코넛 팬케이크, 손두부 국수를 찾아온다.핸드폰으로 촬영하며 SNS에 올리고, 노점의 할머니는 '인플루언서'가 된다. 재래시장은 유튜브가 만들지 못한 진짜 미식 콘텐츠의 근원이다.---베트남 – 벤..

부활의 불꽃 – 다시 태어나는 동남아의 전통 음식들

도시의 속도는 전통을 밀어낸다. 하지만 동시에, 그 속도에 지친 이들이 다시 옛 맛을 찾기 시작한다. 젊은 셰프들은 할머니의 냄비를 다시 꺼내고, 디자인 스튜디오에선 대나무 포장을 복원하며, SNS에선 ‘잊힌 맛’이라는 태그가 늘고 있다.사라진 줄 알았던 음식이 돌아오고 있다. 때로는 원형 그대로, 때로는 변주를 입고. 이것은 단지 요리의 복원이 아니라, 정체성의 귀환이다.---태국 – 까오람, 미니멀의 디자인으로 돌아오다방콕의 젊은 디자이너 셰프들은 **까오람(Khao Lam)**을 현대적인 방식으로 재해석하고 있다. 대나무 통 대신 친환경 패키지를 쓰고, 코코넛 크림과 고소한 통팥을 더해 ‘디저트 바’로 팔기도 한다.길거리에서 사라졌던 이 음식이 고급 카페와 전시 공간에서 부활 중이다. 미니멀하게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