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끼의 가격 - 동남아 식사의 경제학 8

미얀마 편 - 격동 속 식탁 위의 정적

미얀마의 식탁은 조용하지만 강렬하다. 겉보기엔 단출하고 소박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식민지 시절의 상처, 군부 통치의 흔적, 불안한 정세 속에 피어난 민중의 생명력이 깃들어 있다. 거리의 노점상, 시골 마을의 나무 밑 평상, 사원 옆 작은 찻집까지. 미얀마의 한 끼는 그 나라의 풍경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우리는 오늘, 양곤의 한 조용한 오후, 맥주 한 잔을 곁들인 다섯 가지 음식 속으로 들어간다.### 1. 라페톡(Laphet Thoke) – 씹을수록 깊어지는 발효의 향라페톡은 발효된 찻잎을 주재료로 하는 미얀마 전통 샐러드로, 땅콩, 콩, 마늘, 마른 새우, 토마토 등을 잘게 썰어 넣어 비빈다. 처음에는 차잎 샐러드라는 개념이 낯설지만, 한입 베어물면 입안에 터지는 감칠맛이 병아리콩으로 만든 미얀마 비..

싱가포르 편 - 고급과 소박, 그 사이의 도시 국가

싱가포르에서 한 끼를 먹는다는 건 단순히 배를 채우는 일이 아니다. 이 조그마한 도시국가는 고층 빌딩 사이의 푸드코트에서부터 미슐랭 스타 노점까지, 요리의 천국이자 실험실이다. 높은 물가와 빠르게 변화하는 도시 환경 속에서, 한 끼의 가격은 곧 삶의 균형을 말해준다. 이 도시는 경제적 여유가 많은 이들에게도,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사람들에게도 각기 다른 '식사의 얼굴'을 제시한다.### 1. 하이난 치킨라이스(Hainanese Chicken Rice) – 식민의 흔적, 국민의 선택하이난 치킨라이스는 싱가포르 국민들이 가장 자주 먹는 한 끼 중 하나다. 닭고기를 부드럽게 삶아낸 후 그 육수로 지은 밥과 함께 내는 이 음식은 단순하지만 깊은 풍미를 자랑한다. 간장, 칠리소스, 생강 소스 세 가지를 곁들여 먹..

말레이시아 편 - 다양한 얼굴을 가진 식탁

말레이시아의 식탁을 처음 마주하는 사람은 종종 혼란에 빠진다. 중국식 면 요리 옆에 인도식 커리, 그리고 그 옆엔 말레이 전통 쌀밥과 찜요리가 어우러져 있다. 세 가지 민족이 하나의 나라에 어울려 살면서 자연스레 형성된 이 복합적인 풍경은, 단순한 다문화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그 다양성은 입속에서 하나의 조화로 녹아들며, 때로는 충돌도 일으킨다. 말레이시아의 한 끼는 단순한 식사 이상의 정치적, 역사적, 그리고 문화적 상징이 되기도 한다.### 1. 나시 르막(Nasi Lemak) – 민족 정체성이 담긴 아침나시 르막은 말레이시아의 대표적인 아침 식사이자, 사실상 '국민 음식'이다. 코코넛 밀크로 지은 밥, 멸치볶음, 삶은 달걀, 오이, 땅콩, 그리고 결정적으로 삼발 소스가 곁들여진다. 삼발의 매콤함과 ..

필리핀 편 - 정 많고 맛도 진한 나라

필리핀은 첫인상부터 낯익다. 미국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는 거리, 영어 간판, 패스트푸드점과 시끄러운 지프니들. 그러나 그 복잡함 속에서도 무심히 지나칠 수 없는 건 골목골목에서 피어나는 음식 냄새다. 기름에 튀긴 고기, 불에 구운 생선, 달콤한 간장 냄새. 필리핀에서 '한 끼의 가격'은 단순히 음식에만 붙는 숫자가 아니라, 가족과 일상, 그리고 공동체의 온도가 함께 엮여 있는 감정의 단위다.필리핀의 식탁은 '정'으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그 정은 시장에서, 골목에서, 학교 앞 포장마차에서 가장 뜨겁다. 비록 계층 간, 지역 간 가격 차는 존재하지만, 전체적으로 필리핀의 한 끼는 '싸고 든든하다'는 인상을 준다. 산미구엘 맥주 한 병 값보다 저렴한 식사가 흔하며, 무엇보다 함께 먹는 문화가 지배적이다...

인도네시아 편 - 섬들 위의 식탁

인도네시아를 처음 여행했던 날은 자카르타 공항에 새벽에 도착했을 때였다. 아직 동이 트지 않은 거리에는 이따금씩 마이크에 울려 퍼지는 기도 소리만이 귓가에 울렸다. 무슬림 국가의 하루는 그렇게 고요하게 시작된다. 하지만 해가 뜨기 시작하면, 이 나라는 갑자기 뜨겁고 활기찬 식탁 위로 변신한다. 수천 개의 섬, 수백 개의 언어, 그리고 수많은 민족이 공존하는 인도네시아에서 '한 끼의 가격'이란, 단순한 숫자나 통화 단위로 정의되기 어려운 이야기다.인도네시아는 그 다양성만큼이나 식사의 형태와 가격도 다채롭다. 거리에서 파는 나시고렝(Nasi Goreng) 한 접시가 7,000루피아(한화 약 600원)에 불과할 수 있는가 하면, 발리의 리조트에서는 똑같은 이름의 음식이 100,000루피아 이상을 호가하기도 한..

태국 편 - 뜨거운 국물과 낯선 숫자들

태국에서의 첫 식사는 늘 쉽게 다가온다. 거리 곳곳에 놓인 노점들, 냄비에서 김을 피우는 쌀국수, 산처럼 쌓인 과일, 비닐봉지에 담긴 카레와 밥. 이 모든 것이 익숙한 듯 낯설고, 자유로운 듯 계산되어 있다. 음식은 손쉽게 손에 쥘 수 있지만, 그 가격에는 낯선 수학이 숨어 있다.처음 방콕에 도착했을 때 나는 한 접시의 팟타이가 왜 60밧인지 몰랐다. 왜 노점의 똠얌은 40밧이고, 백화점 푸드코트의 똠얌은 120밧인지 헷갈렸다. 더 놀라운 건, 어떤 날은 20밧으로 배부를 수 있는데 어떤 날은 100밧을 써도 허기진 기분이었다. 돈의 액수보다 그 한 끼가 주는 만족감과 무게가, 너무 달랐다.거리의 음식, 숫자의 격차태국의 길거리 음식은 ‘천국’이라는 표현을 자주 듣는다. 실제로, 30밧에서 50밧 사이의..

베트남 편 - 싸고 깊은 맛, 거리의 국수들

베트남 하노이의 이른 아침, 아직 안개가 걷히지 않은 골목을 걷다 보면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수 냄비 하나가 거리를 감싼다. 숨어 있는 듯하지만 실은 누구나 아는 자리. 그 국수 포장마차는 철제 의자 몇 개와 작은 플라스틱 테이블 하나만으로도 하나의 식당이 된다. 노상 식탁 위엔 생강, 고수, 레몬그라스의 향이 겹겹이 깔리고, 손님들의 말소리와 국물 떠먹는 소리가 한데 어우러진다.처음으로 베트남을 찾았을 때, 나는 '쌀국수 한 그릇이 1달러'라는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었다. 하노이의 구시가지 골목에서 먹은 첫 끼는 포보(phở bò)였고, 가격은 정확히 25,000동. 환율로 따지면 1달러가 채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맛은 값보다 훨씬 무거웠다. 고기를 삶아 우린 국물은 맑고 깊었고,..

한 끼의 가격 – 동남아 식사의 경제학

서문: 한 끼의 가격, 삶의 무게바삭한 튀김의 온기, 연기가 아직 머무는 국수 한 그릇, 옆자리에서 흘러나오는 사람들의 웃음. 우리는 흔히 '한 끼'를 단순히 에너지를 보충하는 행위로 여긴다. 그러나 동남아시아의 거리에서 마주친 수많은 음식들은 단지 배를 채우는 것을 넘어, 그 사회가 품고 있는 경제의 얼굴, 계층의 결, 지역의 생리를 품고 있었다.나는 무심코 건넨 동전 몇 개가 한 가족의 오늘 장사 수익의 전부가 되는 시장 한 켠의 노점을 지나며, ‘한 끼’가 가지는 진짜 가격은 무엇일까를 묻게 되었다. 그건 단순히 화폐 단위의 문제가 아니었다. 물가, 임금, 식재료의 수급, 상권의 위치, 그리고 그 나라가 얼마나 외식에 열려 있는가까지도 포함되는 거대한 구조의 반영이었다.이 시리즈는 동남아 각국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