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 나라별 음식 142

고요한 거리, 따뜻한 집밥 – 베트남 뗏(Tết) 명절의 식탁에서

출장이라는 건 늘 낯선 시간의 조각을 흘리며 살아가는 일이다. 그날도 그랬다. 베트남 하노이에 도착한 건 1월 말, 설 연휴 직전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Tết Nguyên Đán, 그러니까 음력 설인 ‘뗏’ 명절의 첫날이었다.처음엔 아무 생각 없었다. 현지 미팅만 잡히면 어느 도시든 큰 차이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하노이에 발을 디디자마자 분위기가 이상했다. 거리엔 자동차가 거의 없었고, 택시도 잡히지 않았다. 카페며 식당은 불이 꺼져 있었고, 호텔 직원은 머쓱한 미소로 말했다.“Sorry, sir. Tết mà.”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다. 하지만 며칠 후 나는 그 말을 잊지 못하게 됐다.---전 국민이 멈추는 시간Tết는 단순한 연휴가 아니다. 베트남 전체가 숨을 멈추는 시간이다. 하노이의 시장..

깨부순 닭, 터지는 향신료 – 아얌 페냇(Ayam Penyet)의 인도네시아적 분노와 사랑

처음 아얌 페냇(Ayam Penyet)을 먹은 건 인도네시아 수라바야의 길가 푸드코트였다. 나무 의자가 덜컥거렸고, 주방에서는 마늘과 고추를 으깨는 소리가 들렸다. 'Penyet'란 말이 뭐냐고 물었을 때, 직원은 웃으며 손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세게 쳤다. "눌러! 깨부숴! 그런 뜻이야." 실제로 내 접시 위에 나온 닭고기는 단순한 튀김이 아니었다. 망치로 두들긴 듯 납작하게 으깨져 있었고, 그 위에는 눈이 따가울 정도로 매운 삼발이 얹혀 있었다. 옆에는 템페(콩발효튀김), 두부튀김, 오이, 그리고 뜨거운 밥이 나란히 놓였다.아얌 페냇은 단순히 '튀긴 닭고기'가 아니다. 그것은 인도네시아식 분노, 혹은 해방의 제스처다. 'Penyet'은 자바어로 '으깨다' 혹은 '찧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음식은 ..

20개의 접시, 한 도시의 영혼 – 인도네시아 나시 파당(Nasi Padang)의 철학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의 도시 파당. 나는 이 도시를 처음 간 날, 공항보다 식당을 먼저 들렀다. 식당의 이름은 평범했다. ‘Sederhana’. 인도네시아어로 ‘소박한’. 하지만 그 소박함은 전혀 소박하지 않았다. 테이블에 앉자마자, 주문도 하지 않았는데, 종업원이 20개가 넘는 접시를 잽싸게 테이블 위에 쌓아 올리기 시작했다.닭고기 커리, 생선 튀김, 콩조림, 계란조림, 칠리 페이스트, 카레국, 마른 멸치볶음, 코코넛이루 버무린 채소, 매운 고추절임까지. 각기 다른 접시들이 계단처럼 겹쳐져 한 명의 앞에 쌓였다. 그 순간 나는 마치 어떤 성스러운 의식의 제단 앞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나시 파당(Nasi Padang)**이었다.나시 파당은 단순히 음식의 이름이 아니다. 그것은 인도네..

진한 국물에 잠긴 기억 – 태국 카오 캄 무(Khao Kha Moo)를 먹으며

방콕의 오후는 언제나 숨이 막힐 듯 덥고, 늘 왁자지껄하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출장 중 잠시 짬이 난 오후 3시, 나는 BTS 승강장에서 내려 수쿰윗 뒷골목을 걷고 있었다. 허기보다 먼저 느껴지는 건 국물 끓는 냄새였다. 진한 간장, 계피, 팔각, 그리고 마늘이 뒤섞인 향기가 공기를 무겁게 눌렀다. 향이 이끄는 대로 발을 옮겼고, 곧 나는 한 노점 앞에 멈췄다. 낡은 스테인리스 솥 안에서 족발이 푹 잠긴 채, 오랜 시간 뭉근히 끓고 있었다.“카오 캄 무(Khao Kha Moo) 한 그릇 주세요.”나는 그렇게, 태국의 족발덮밥을 처음 주문했다. 테이블에 앉아있자 곧 한 접시가 나왔다. 잘게 썬 돼지족발, 갈색의 윤기가 흐르는 국물, 밥 위에 얹힌 삶은 달걀, 그리고 옆에는 식초에 절인 마늘과 매운 고추..

새장의 식탁 – 베트남 시골길에서 마주한 살아 있는 식문화

출장이라는 건 늘 일정이 정해진 것 같지만, 정해지지 않은 곳에서 기억에 남는다. 그날도 그랬다. 베트남 북부 외곽, 회의가 끝나고 현지인 직원과 함께 차를 타고 시골길을 달리던 중이었다. 도로 양옆으로 논과 연못이 펼쳐졌고, 오토바이를 탄 사람들이 지나가며 손을 흔들었다. 그 장면 속엔 바쁜 도시에서 느낄 수 없는 여유가 있었다. 점심을 먹자며 차를 세운 곳은 허름한 간판조차 없는 식당이었다. 아연 칼라 지붕 아래 작은 나무 테이블들이 놓여 있었고, 그 옆에는 묘하게 낯선 철제 새장이 빼곡히 줄지어 있었다.“이 집, 맛있어요. 특별한 요리 있어요.”현지 직원이 웃으며 말했다. 처음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가자 사장으로 보이는 중년 남성이 나를 새장 앞으로 데려갔다. 철창 속에..

말레이시아의 한 그릇 진심, Mee Bandung

조호바루 출장은 늘 짧고 빡빡했다. 싱가포르에서 다리 하나만 건너면 바로 접하는 말레이시아였지만, 그 문화와 음식의 결은 전혀 달랐다. 어느 토요일 늦은 오후, 현지 협력업체 대표인 자말(Jamal)과 미팅을 마치고 그의 추천으로 동네 유명 미식 노점으로 향했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Mee Bandung, 안 먹어봤으면 말레이시아 모르는 거야."도착한 곳은 붉은 간판 아래, 플라스틱 테이블과 철제 의자가 어지럽게 놓인 오픈형 식당. 향신료 냄새가 피어오르고, 팬에서 무언가를 볶는 소리가 귀에 익숙했다. 메뉴판은 말레이어로 적혀 있었지만, 자말은 망설임 없이 손가락으로 한 줄을 가리켰다. “Mee Bandung Muar.”---Mee Bandung이란?Mee Bandung은 말레이시아 조호르(Johor..

부드러운 밥과 코코넛 커리의 아침, Lontong Sayur 체험기

자카르타 출장 마지막 날 아침. 호텔 조식을 피하고 싶었던 나는, 평소 친했던 현지 직원 리아(Ria)에게 아침식사 추천을 부탁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 "Lontong Sayur 먹어봤어요? 인도네시아 사람들 아침에 많이 먹는 거예요." Lontong은 밥이고, Sayur는 채소니까, 야채밥쯤 되나? 예상과는 전혀 다른 음식이 눈앞에 펼쳐졌다.리아가 데려간 곳은 사무실 근처의 작은 와룽(Warung), 플라스틱 의자 몇 개와 코코넛 껍질로 만든 장식이 있는 평범한 노점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만난 Lontong Sayur는 출장 내내 먹었던 어떤 음식보다 인도네시아의 일상과 깊이를 더 진하게 담고 있었다.---Lontong Sayur란?Lontong Sayur는 '압축된 밥(Lontong)'과..

검은 먹물 속의 깊은 맛, Adobong Pusit 체험기

마닐라 출장 셋째 날 밤이었다. 하루 종일 이어진 회의와 도로 정체 속에서 지친 몸을 이끌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 현지 파트너가 말했다. “오늘은 특별한 아도보를 먹어볼래요?” 아도보는 이미 여러 번 먹었기에 시큰둥했지만, 이어지는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오징어 아도보, 먹물로 조리된 거예요.”그 이름은 Adobong Pusit. 그날 밤, 내가 필리핀 음식에 대해 갖고 있던 이해의 폭이 한 층 더 넓어지게 된 순간이었다.---Adobong Pusit이란?'Adobo'는 필리핀의 대표적인 조리법으로, 간장, 식초, 마늘, 후추, 월계수잎을 이용해 고기나 해산물을 졸이는 방식이다. 일반적으로는 돼지고기나 닭고기로 만들지만, 해산물 중 오징어(Pusit)를 주재료로 한 이 ‘Adobong Pusit’은 ..

바삭한 컵 안에 담긴 남부 베트남의 풍경, Bánh Cống

베트남의 남부 도시 껀터(Cần Thơ). 메콩 델타를 끼고 펼쳐진 이곳은 내가 베트남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출장지 중 하나다. 복잡한 도심보다는 조금 느린 시간, 수상 시장과 오토바이 대신 자전거로 오가는 사람들, 무엇보다 음식이 무척 독특했다. 현지 직원과의 미팅을 마치고, 저녁 전까지 잠깐 시간이 남아 근처 재래시장으로 향했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작은 식당이 눈에 들어왔다.기름 냄새가 진동하는 그곳에서 튀김 냄비 앞에 앉아 있던 중년 여성이 나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녀가 철제 틀에서 꺼낸 그것은 마치 '작은 컵케이크' 같았다. 금빛의 튀김 옷, 튀어나온 새우 꼬리. 그녀는 그것을 "Bánh Cống"이라 소개했고, 나의 새로운 미식 체험이 시작되었다.---Bánh Cống이란?Bá..

완자 국물 속의 인도네시아: Bakso를 만나다

자카르타 출장 중 어느 오후, 잠시 시간이 비는 틈을 타 혼자 호텔 밖을 나섰다. 고요하면서도 뜨겁게 일렁이는 공기 속에서, 사무실과 시장이 뒤섞인 거리 골목으로 천천히 걸었다. 배도 고프지 않았지만, 뭔가 현지의 온기를 느끼고 싶었다. 그러다 골목 어귀에서 증기를 내뿜으며 뿌연 국물 냄새를 풍기는 작은 노점이 눈에 들어왔다. 허름하지만 인기 있어 보이는 곳. 입간판에는 단 한 단어만 적혀 있었다: "Bakso".나는 아무 말 없이 줄에 섰다. 현지인 사이에 섞여, 땀과 냄새, 분주한 숟가락 소리 사이로 그 음식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봤다.---Bakso란 무엇인가?Bakso는 인도네시아식 고기 완자다. 주로 소고기나 닭고기, 가끔은 생선 또는 혼합육으로 만들어진다. 고기를 곱게 갈고 전분(타피오카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