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 커피 문화 기행 – 커피 한 잔, 경계를 넘는 시간 9

맺음말 – 커피, 국경을 녹이다

동남아의 커피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다. 그것은 계절과 고도, 식민과 저항, 노동과 예술, 그리고 고요한 아침과 부산한 저녁까지 품은 문화의 축소판이다.베트남의 거리 카페에서 시작해, 태국의 북부 산간을 넘어, 인도네시아의 화산 지대와 말레이시아의 호얀 찻집, 필리핀의 바탕가스 고산지대, 싱가포르의 호커센터, 미얀마의 샨 주 농장까지. 우리는 커피 한 잔을 통해 서로 다른 땅, 다른 언어, 다른 역사 속에서도 닿을 수 있었다.이 여정의 끝에서 나는 이제 커피를 마실 때마다, 그 안에 담긴 수많은 얼굴을 떠올린다. 뜨거운 정글 속에서도 커피 체리를 따던 손들, 도심 카페에서 대화를 나누던 눈빛, 그리고 어떤 날엔 단지 버티기 위해 흔들던 쉐익 커피의 리듬까지.커피는 그렇게, 오늘도 국경을 녹이고 있다.

미얀마 – 쉐익 커피와 산지의 부활

양곤 도심의 한복판, 노점상 아주머니가 두툼한 플라스틱 컵에 커피를 쏟아붓는다. 분말 커피에 연유를 넣고 얼음을 가득 채운 다음, 뚜껑을 덮고 흔들기 시작한다. 쉐익 커피(Shwek Coffee). 미얀마식 아이스 커피의 이름이다. 쉐익은 영어 ‘Shake’의 발음을 현지식으로 읽은 것이다.이 커피는 1,000짯이면 살 수 있는 거리의 위안이다. 노점상, 학생, 군인, 사무직, 누구나 아침 혹은 점심에 이 쉐익 커피를 손에 들고 있다.그 달콤하고 묵직한 커피는 무더위와 가난, 불확실한 하루를 견디게 해주는 작지만 확실한 위로다. 미얀마 커피 문화는 그렇게 복잡한 정치와 가난한 현실을 뚫고 살아남은 민중의 커피로 시작된다.샨 주의 부활 – 아라비카의 가능성오랫동안 양귀비 재배로 악명 높았던 미얀마 샨(Sh..

싱가포르 – 카야 토스트를 넘어, 호커센터의 진화

싱가포르의 커피 문화는 작지만 강렬한 도시국가답게, 밀도 높고 복합적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늘 ‘코피(Kopi)’가 있다. 그러나 이 코피는 단순히 커피 그 이상이다. 말레이시아와 비슷하면서도 싱가포르만의 세련된 감각과 체계적인 소비 문화가 녹아 있는 존재다.나는 맥스웰 호커센터에서 아침으로 카야 토스트와 반숙 달걀, 그리고 코피 C를 주문했다. 진하고 부드러우며, 동시에 고소한 이 커피는 도시의 모든 속도를 잠시 멈추게 만들 만큼 힘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엔 싱가포르 커피 문화의 모든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전통 코피의 미학 – 흐린 잔 속의 기억싱가포르의 전통 커피, 즉 ‘코피’는 로부스타 원두를 다크 로스팅해, 설탕과 마가린 또는 버터와 함께 볶아낸 뒤 천 재질의 필터 ‘Sock’에 넣고 우려낸..

바탕가스의 바리코스 – 호랑이 커피의 자존심

필리핀 커피의 상징이라면 단연 **카페 바리코스(Kape Barako)**일 것이다. 바탕가스(Batangas) 지방에서 주로 재배되는 이 커피는 리베리카(Liberica) 품종으로, 전 세계 커피 생산량의 1%도 안 되는 희귀 품종이다. 일반적인 아라비카나 로부스타에 비해 두 배 가까이 큰 원두, 독특한 꽃향기, 스파이시한 풍미, 그리고 매우 강한 바디감이 특징이다.‘Barako’라는 단어는 타갈로그어로 ‘수컷’ 또는 ‘강한 남자’를 뜻한다. 그래서인지 이 커피는 늘 ‘호랑이 커피’라고 불리며 필리핀 남성성의 상징처럼 여겨지기도 했다.나는 바탕가스 시 외곽의 한 가족 농장에서 바리코스를 처음 맛봤다. 커피는 주전자에 가루째 끓였고, 여과 없이 그대로 컵에 담겨 나왔다. 바닥에 침전물이 깔려 있었고, 한..

말레이시아 – 코피오, 호얀 커피, 그리고 옛 골목의 향기

말레이시아의 아침은 빠르다. 날이 밝기도 전에 시장은 북적이고, 골목 끝 호커센터의 팬과 웍은 쉼 없이 달궈진다. 그리고 그 시작을 알리는 건 늘 커피 한 잔이다. **코피(Kopi)**라 불리는 이 진하고, 단맛 강한 커피는 말레이시아인의 하루를 깨우는 신호탄이다.나는 페낭의 조지타운, 이포의 한 오래된 찻집, 그리고 쿠알라룸푸르의 푸두 시장 근처 노포를 돌며 말레이 커피의 진짜 얼굴을 만나기 시작했다.코피오의 나라, 말레이시아말레이시아 커피의 세계는 알파벳 네 글자로 시작된다. 바로 K-O-P-I. 이 단어 뒤에 붙는 알파벳 한 글자, 예컨대 ‘O’, ‘C’, ‘S’가 커피의 맛과 인생을 결정짓는다.Kopi: 연유와 설탕이 들어간 기본 커피Kopi O: 설탕만 넣은 블랙 커피Kopi C: 연유 대신 ..

인도네시아 – 자바, 토라자, 그리고 코피 뚜북의 시간

인도네시아는 아시아에서 커피 역사의 기원을 논할 때 절대 빠질 수 없는 나라다. '자바 커피(Java Coffee)'라는 말이 전 세계적으로 통용될 정도로, 이 나라는 오랜 커피 역사를 자랑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인도네시아 현지인의 일상 속 커피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이 여행은 자카르타에서 시작해, 족자카르타를 지나, 수마트라의 아체까지 이어졌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오래 머물렀던 곳은 술라웨시의 토라자였다.---코피 뚜북 – 한 모금의 진실한 시간‘코피 뚜북(Kopi Tubruk)’은 인도네시아의 가장 보편적인 커피 방식이다. 직역하면 “부딪혀 섞다”는 뜻으로, 끓인 물에 곱게 간 로부스타 원두를 바로 넣고 저어 마신다. 필터도, 드리퍼도 없다. 단순하면서도 거칠고 진한 맛이 ..

태국 – 커피 올렌과 북부의 느린 시간

태국의 커피는 한 모금으로 모든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보다 더 조용히, 때론 설탕보다 느리게 스며든다. 강렬한 맛 대신, 태국 커피는 ‘삶의 방식’에 가까웠다. 그것은 북부 산악지대에서의 느린 생활, 불교 사원에서의 침묵, 그리고 어느 노점 커피차 옆에 서서 기다리는 나른한 오후처럼 찾아왔다.치앙마이의 골목에서태국 북부 치앙마이. 아침 일찍 골목으로 나섰다. 뿌연 안개가 고산지대를 감싸고 있었고, 산책 나온 개들이 발걸음을 쫓았다. 거리 끝, 작고 반쯤 열린 철문 앞에 빨간색 트럭이 멈춰 섰다. 뒤쪽 짐칸에 작게 써진 문구 – "กาแฟโบราณ (กาแฟเย็น)". 태국식 전통 아이스커피를 판다는 뜻이다.나는 커피를 한 잔 주문했다. 주인아저씨는 검은 액체를 주전자에서 따라 컵에 붓고, 연유를 섞은..

베트남 – 연유 아래에 감춰진 역사, 카페 쓰어다의 세계로

베트남의 아침은 소란스럽다. 모터바이크의 굉음, 쌀국수를 끓이는 국물 냄새, 철제 샷셔를 걷어 올리는 소리. 그 가운데 언제나 자리하고 있는 것은 바로 ‘카페 쓰어다(Cà phê sữa đá)’, 베트남식 아이스 연유커피다.길가에 앉은 플라스틱 의자 위의 커피나는 하노이에 도착한 다음날, 아침 7시에 숙소를 나섰다. 작은 골목 안, 허름한 노점에서 아주머니가 손에 들고 있던 금속 필터 ‘푹(Phin)’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분쇄된 로부스타 커피는 천천히 물을 흡수하며 아래로 검은 액체를 떨궜고, 그 아래엔 하얀 연유가 깔려 있었다.베트남식 커피는 기다림의 문화다. ‘빠르게 소비되는 일상 속의 느림’이자, 커피가 내리는 동안 대화를 나누고, 오토바이의 흐름을 바라보며 사람을 관찰하는 문화다. 나는 15분쯤..

동남아 커피 문화 기행 – 커피 한 잔, 경계를 넘는 시간

서문: 커피잔 위에 피어난 열대의 향기동남아를 걷는다는 것은, 단지 국경을 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냄새의 흐름을 따라 움직이는 일이며, 그중에서도 가장 진하고 끈적한 향기는 단연코 커피에서 비롯된다. 이곳의 커피는 단지 카페인이 아니다. 그것은 식민의 기억이요, 농부의 땀이며, 도시의 아침 풍경이고, 한낮의 일탈이다.나는 이 여행을 커피 한 잔에서 시작했다.베트남 하노이의 분주한 골목에서,태국 치앙마이의 조용한 골목에서,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의 시장에서,말레이시아 이포의 노포에서,필리핀 바탕가스의 가정집에서,싱가포르 부기스의 호커센터에서,그리고 미얀마 샨주의 농장에서.모두 다르지만, 이상하리만큼 익숙한 커피 향이었다.이 글은 동남아 7개국의 커피 문화를, 그 나라 사람들의 일상과 함께 짚어보는 기행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