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 나라별 음식/Indonesia 22

깨부순 닭, 터지는 향신료 – 아얌 페냇(Ayam Penyet)의 인도네시아적 분노와 사랑

처음 아얌 페냇(Ayam Penyet)을 먹은 건 인도네시아 수라바야의 길가 푸드코트였다. 나무 의자가 덜컥거렸고, 주방에서는 마늘과 고추를 으깨는 소리가 들렸다. 'Penyet'란 말이 뭐냐고 물었을 때, 직원은 웃으며 손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세게 쳤다. "눌러! 깨부숴! 그런 뜻이야." 실제로 내 접시 위에 나온 닭고기는 단순한 튀김이 아니었다. 망치로 두들긴 듯 납작하게 으깨져 있었고, 그 위에는 눈이 따가울 정도로 매운 삼발이 얹혀 있었다. 옆에는 템페(콩발효튀김), 두부튀김, 오이, 그리고 뜨거운 밥이 나란히 놓였다.아얌 페냇은 단순히 '튀긴 닭고기'가 아니다. 그것은 인도네시아식 분노, 혹은 해방의 제스처다. 'Penyet'은 자바어로 '으깨다' 혹은 '찧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음식은 ..

20개의 접시, 한 도시의 영혼 – 인도네시아 나시 파당(Nasi Padang)의 철학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의 도시 파당. 나는 이 도시를 처음 간 날, 공항보다 식당을 먼저 들렀다. 식당의 이름은 평범했다. ‘Sederhana’. 인도네시아어로 ‘소박한’. 하지만 그 소박함은 전혀 소박하지 않았다. 테이블에 앉자마자, 주문도 하지 않았는데, 종업원이 20개가 넘는 접시를 잽싸게 테이블 위에 쌓아 올리기 시작했다.닭고기 커리, 생선 튀김, 콩조림, 계란조림, 칠리 페이스트, 카레국, 마른 멸치볶음, 코코넛이루 버무린 채소, 매운 고추절임까지. 각기 다른 접시들이 계단처럼 겹쳐져 한 명의 앞에 쌓였다. 그 순간 나는 마치 어떤 성스러운 의식의 제단 앞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나시 파당(Nasi Padang)**이었다.나시 파당은 단순히 음식의 이름이 아니다. 그것은 인도네..

부드러운 밥과 코코넛 커리의 아침, Lontong Sayur 체험기

자카르타 출장 마지막 날 아침. 호텔 조식을 피하고 싶었던 나는, 평소 친했던 현지 직원 리아(Ria)에게 아침식사 추천을 부탁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 "Lontong Sayur 먹어봤어요? 인도네시아 사람들 아침에 많이 먹는 거예요." Lontong은 밥이고, Sayur는 채소니까, 야채밥쯤 되나? 예상과는 전혀 다른 음식이 눈앞에 펼쳐졌다.리아가 데려간 곳은 사무실 근처의 작은 와룽(Warung), 플라스틱 의자 몇 개와 코코넛 껍질로 만든 장식이 있는 평범한 노점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만난 Lontong Sayur는 출장 내내 먹었던 어떤 음식보다 인도네시아의 일상과 깊이를 더 진하게 담고 있었다.---Lontong Sayur란?Lontong Sayur는 '압축된 밥(Lontong)'과..

완자 국물 속의 인도네시아: Bakso를 만나다

자카르타 출장 중 어느 오후, 잠시 시간이 비는 틈을 타 혼자 호텔 밖을 나섰다. 고요하면서도 뜨겁게 일렁이는 공기 속에서, 사무실과 시장이 뒤섞인 거리 골목으로 천천히 걸었다. 배도 고프지 않았지만, 뭔가 현지의 온기를 느끼고 싶었다. 그러다 골목 어귀에서 증기를 내뿜으며 뿌연 국물 냄새를 풍기는 작은 노점이 눈에 들어왔다. 허름하지만 인기 있어 보이는 곳. 입간판에는 단 한 단어만 적혀 있었다: "Bakso".나는 아무 말 없이 줄에 섰다. 현지인 사이에 섞여, 땀과 냄새, 분주한 숟가락 소리 사이로 그 음식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봤다.---Bakso란 무엇인가?Bakso는 인도네시아식 고기 완자다. 주로 소고기나 닭고기, 가끔은 생선 또는 혼합육으로 만들어진다. 고기를 곱게 갈고 전분(타피오카 전..

Ayam Penyet – 으깨진 닭 위로 올라앉은 삼발의 불꽃

인도네시아 자바섬 중부, 솔로(Solo) 시의 작은 길거리 식당. 플라스틱 접시에 담겨 나온 건, 평범해 보이는 닭다리 한 조각과 산처럼 쌓인 붉은 고추 소스. 닭은 마치 누군가가 손바닥으로 쾅 내리친 듯, 납작하게 으깨져 있었고, 그 위에 고추 삼발이 얹혀 있었다. 이것이 바로 Ayam Penyet(아얌 뻰옛), 인도네시아식 ‘으깬 닭튀김’이다.먹기 전까진 몰랐다. 이 단순해 보이는 음식이 내 혀를 이렇게 정직하게 흔들 줄은.Ayam Penyet이란? ‘Ayam’은 닭, ‘Penyet’은 으깨다 혹은 눌러서 납작하게 만들다라는 뜻이다. 즉, Ayam Penyet은 튀긴 닭을 절구나 나무망치 등으로 납작하게 으깬 뒤, 매운 고추 삼발 소스를 얹어 먹는 자바 전통 음식이다.이 음식은 단순히 튀김 위에 고추..

Pempek – 생선의 고소함과 식초의 날카로움이 만난 팔렘방의 유산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남부의 도시, 팔렘방. 항구도시 특유의 습기와 민물 냄새가 감도는 이곳에 도착한 나는, 첫 끼로 ‘Pempek(뻼뻭)’을 선택했다. 친구는 말했다. “이건 그냥 음식이 아니야. 이 도시의 정체성이야.”노점 좌판 위의 유리 진열대 안에는 마치 한국의 오뎅처럼 생긴 다양한 튀김 반죽들이 놓여 있었다. 길쭉한 것, 동그란 것, 속이 비어 있는 것, 삶은 달걀이 들어간 것까지 종류가 매우 다양했다. 하지만 이 모든 걸 하나로 묶는 건, 그 정체불명의 시큼한 갈색 소스였다.이 소스의 이름은 ‘Cuko(쭈꼬)’. 그리고 그것이 Pempek의 영혼이다.Pempek이란? Pempek은 팔렘방 지역에서 유래된 대표적인 생선 반죽 튀김 음식이다. 주재료는 **흰살 생선(주로 텡기리 또는 바랑가스)**과..

Rawon – 어둠 속의 향신료, 검은 국물에 담긴 동자바의 시간

수라바야에 도착한 건 한밤중이었다. 정돈되지 않은 도로, 오토바이의 경적, 그리고 공기 중에 떠다니는 묘한 향기. 현지 친구가 나를 데려간 곳은 가로등 아래 작은 로컬 워룽(warung, 노점). 친구는 별말 없이 메뉴를 골랐다. 이름은 ‘Rawon(라원)’. 나는 아무 것도 모른 채 “그게 뭐야?”라고 물었고, 돌아온 대답은 짧았다.“검은 국물 소고기 수프. 이 지역의 자존심이야.”그릇이 도착했다. 국물은 진하고 검었다. 한국인의 감각으로는 약간의 경계심을 유발할 정도였다. 검은색 음식이라니. 그런데 그 안에서 은은하게 퍼지는 향은 익숙한 듯 낯설었고, 첫 숟가락을 뜨는 순간, 내 감각은 완전히 바뀌었다.Rawon이란 무엇인가Rawon은 인도네시아 동자바, 특히 수라바야와 말랑 지역에서 유래한 대표적인..

Soto Betawi – 자카르타 한복판에서 마주한 하얀 국물의 위로

자카르타의 거리. 혼잡하고 시끄러운 도시의 리듬이 익숙해질 즈음, 한파에 익숙한 내 몸은 이곳의 열기와 습도에 지쳐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날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수증기 피어나는 국물 한 그릇 앞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친구는 말한다. “오늘은 Soto Betawi(소토 브따위) 먹자. 이 도시의 국물이야.”나는 단어만으로는 도무지 상상되지 않던 이 요리를 처음 맛보게 되었다. 시장 안 허름한 벽돌 노점, 플라스틱 테이블, 무채색 의자들. 하지만 테이블 위에 놓인 국물 그릇은, 예상과는 전혀 다른 색이었다.국물이 하얬다. 진한 크림색, 약간은 밀크 스프 같기도 하고, 뭔가 묘하게 고급스러운 색. 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며, 코끝을 간질이는 건 코코넛 밀크, 향신료, 그리고 쇠고기 기름 냄새였다..

뻘 커피 한 잔 – 자바 출장 중 마주한 커피의 뿌리

인도네시아 출장 3일 차. 자카르타에서 시작된 여정은 이제 중부 자바의 한적한 마을로 이어지고 있었다. 에어컨 없는 회의실, 간간이 끊기는 인터넷, 모기 한두 마리의 집요한 방해. 그 가운데서도 내 몸을 일으킨 건 한 잔의 뜨거운 커피였다.정확히 말하자면, 커피라기보단 커피 같지 않은 뭔가였다.---이름도 낯선 '뻘 커피'현지 직원이 “꼬삐 뚜브룩(Kopi Tubruk), 드셔보셨어요?”라고 물었을 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처음엔 이상할 거예요. 뻘 같아서요.”뻘? 순간 내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는 커피가 아니라 진흙탕이었다. 하지만 그는 따뜻한 미소로 흙 벽돌로 만든 구식 찻잔을 내게 건넸다.겉보기엔 평범했다. 검고 깊은 갈색 액체. 하지만 유리잔 바닥에 두텁게 깔린 커피가루, ..

Ayam Betutu – 발리의 향신료로 싸인 닭 한 마리의 제사와 축복

흙가마 속에서 긴 시간 천천히 익어간 닭 한 마리. 살은 거의 부서지듯 부드럽고, 내부는 향신료와 허브의 폭발이다.이건 단순한 닭요리가 아니다. 신에게 올리던 제사 음식, 그리고 발리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명절의 맛. 이름하여 아얌 브투뚜(Ayam Betutu).---Ayam Betutu란?Ayam Betutu는 발리 전통 향신료(Bumbu Betutu)를 채운 닭을 잎으로 싸서 오랜 시간 찌거나 굽는 요리다.‘Ayam’ = 닭‘Betutu’ = 향신료 속에서 천천히 익힌 조리법인도네시아의 수많은 닭 요리 중에서도 가장 풍미가 강하고, 의식적 의미가 담긴 요리다.---유래와 역사Ayam Betutu는 발리의 힌두 의식 음식에서 유래했다.사원 제사(Piodalan), 가족 조상 숭배, 결혼식, 생일 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