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만의 맛과 향 11

제11장. 세계화 시대에도 살아남는 로컬의 맛

지금 우리는 ‘맛의 세계화’ 시대에 살고 있다. 클릭 한 번이면 세계 어디의 레시피든 영상으로 볼 수 있고, 주요 도시의 슈퍼마켓에는 타마린드 페이스트부터 코코넛밀크, 피쉬소스, 라이스누들까지 구비되어 있다. 태국 요리는 뉴욕의 음식 축제를 휩쓸고, 베트남의 퍼는 런던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건강식으로 각광받는다.이렇게 로컬 재료와 조리법이 국경을 넘어 확산되는 시대, 과연 동남아의 재료들은 어떻게 변화하고, 무엇을 지키고 있을까?---1. 글로벌 슈퍼푸드가 된 지역 재료들오늘날 동남아의 재료 중 상당수는 이미 글로벌 트렌드의 중심에 있다.템페는 식물성 단백질의 대명사로 떠올랐고, 코코넛 오일은 건강한 지방의 상징이 되었으며, 피쉬소스는 세계적인 셰프들이 감칠맛의 비밀 병기로 쓰는 조미료다. 타마린드는 신맛..

제10장. 동남아의 채소와 허브의 세계: 고수, 락사잎, 바질, 민트

향신료 없이도 맛이 깊을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동남아는 이렇게 답한다. “허브가 있다.”허브는 동남아 요리에서 단순히 곁들임이나 고명의 역할을 넘어, 맛의 균형을 맞추고, 생동감을 부여하며, 음식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로 기능한다. 국물 한 숟갈, 볶음 한 젓가락, 튀김 한 조각에 곁들여진 허브 한 줄기가 맛의 전체적 인상을 바꾸어 놓는다.특히 고수, 락사잎, 바질, 민트는 동남아 식탁에서 국민허브라 할 만하다. 그 향은 향신료보다 날카롭고, 그 존재감은 메인 재료에 필적한다. 이 장에서는 이 네 가지 허브가 어떤 방식으로 지역 정체성, 문화적 상징, 사회적 코드가 되었는지를 들여다본다.---1. 고수(Cilantro): 혐오와 중독 사이의 문화 코드고수는 동남아 음식에서 가장 논쟁적인 허브다...

제9장. 피와 내장을 사랑하는 문화: 금기와 존중 사이에서

동남아 음식 문화에서 외국인들이 가장 충격을 받는 재료 중 하나는 바로 동물의 피와 내장이다. 닭피를 굳힌 국, 돼지의 귀와 혀, 소의 위를 볶아 만든 요리, 그리고 끓는 피에 고기를 넣고 조리한 찌개. 많은 이들에게 이는 금기나 혐오의 대상처럼 비춰지지만, 동남아에서는 오히려 최고의 진미로 여겨진다.이 문화는 단순히 ‘버릴 것이 없어서’ 먹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동물에 대한 전인적 존중과, 음식에 깃든 공동체적 윤리, 그리고 지속가능한 자원 활용이라는 오랜 지혜가 담긴 결과다. 동남아에서 피와 내장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그 사회의 생명관과 식생활 철학을 이해하는 지름길이다.---1. 피의 요리: 디누구안과 루억찻필리핀의 **디누구안(Dinuguan)**은 대표적인 ‘피 요리’다. 돼지..

제8장. 코코넛, 야자당, 타마린드: 달콤한 기억의 근원

음식 속의 단맛은 때때로 강한 향신료보다도 더 깊은 감정을 자극한다. 단맛은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고, 사람 사이의 유대를 부드럽게 만들며, 일상의 고단함 속에 작은 위안을 선사한다. 그런데 이 단맛이 설탕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서 채취한 수액과 과일, 견과에서 비롯되었을 때, 그 단맛은 단순한 맛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동남아의 단맛은 그렇게 태어났다. 정제된 백설탕이 대중화되기 이전, 이 지역 사람들은 코코넛의 과육, 야자수에서 뽑은 수액, 타마린드의 신맛 속에 숨겨진 당분으로 삶을 달랬고, 축제를 장식했고, 종교 의례를 완성했다. 이 장에서는 그중 대표적인 세 가지, 코코넛(Coconut), 야자당(Palm Sugar), **타마린드(Tamarind)**가 음식 속에서 어떻게 문화가 되었는지..

제7장. 템페와 멜린조: 인도네시아의 콩 발효문화

인도네시아의 식탁을 이야기할 때, 빠뜨릴 수 없는 두 가지 재료가 있다. 하나는 템페(Tempeh), 다른 하나는 **멜린조(Melinjo)**다. 둘은 모두 콩과 식물에서 유래한 재료이지만, 그 의미와 위치는 서로 다르다. 템페가 발효와 건강의 상징이라면, 멜린조는 쓴맛과 전통, 그리고 논쟁의 중심에 선 재료다.이 두 재료는 단지 먹는 식재료가 아니라, 인도네시아인의 정체성과 일상의 일부로 깊이 뿌리내린 존재다. 그리고 놀랍게도, 전 세계 채식주의 흐름과 장수식품 열풍 속에서 이 재료들이 국제적으로 재조명되고 있다.---1. 템페: 인도네시아가 세계에 내놓은 ‘살아 있는 단백질’템페는 삶은 콩에 곰팡이를 접종하여 발효시킨 식품이다. 겉모습은 약간 떡처럼 보이고, 단단한 블록 형태로 되어 있어 잘 썰리며..

제6장. 발효의 미학: 바고옹, 응아삐, 프라혹의 세계

동남아의 요리를 처음 접한 이들이 당황하는 또 하나의 지점이 있다면, 그것은 **“냄새”**다. 흔히 우리는 어떤 음식의 향을 기준으로 그 맛을 상상한다. 그런데 동남아 요리에서는 종종, “이게 이렇게 맛있을 줄 몰랐다”는 반응이 나오곤 한다. 그것은 곧 후각과 미각의 불일치이며, 동시에 발효라는 시간의 기술이 만들어낸 ‘냄새 나는 깊이’의 힘이다.피쉬소스가 액체라면, 그 진화 이전 단계 또는 더 응축된 형태가 바로 발효 생선 페이스트다. 동남아 각국에는 저마다 이름은 다르지만 **생선을 으깨고 소금에 절여 햇볕에 말리고, 그것이 썩듯 발효되며 만들어진 묵직한 ‘발효의 덩어리’**가 존재한다. 그것이 **바고옹(Bagoong), 응아삐(Ngapi), 프라혹(Prahok)**이다.---1. 바고옹(Bago..

제5장. 뿌리의 철학: 갈랑갈과 레몬그라스의 내력

음식에서 향이 가진 힘은 실로 크다. 후각은 기억을 지배하고, 어떤 재료는 단 한 번의 냄새로 특정 장소와 문화를 떠올리게 한다. 동남아 요리를 처음 접한 이들이 놀라는 것은 바로 이 향의 정체다. 어디서도 맡아본 적 없는,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을 끄는 이 향은 대개 **갈랑갈(Galangal)**과 **레몬그라스(Lemongrass)**에서 비롯된다. 마치 마늘과 생강이 한·중·일 요리의 기본이라면, 동남아의 향은 이 두 뿌리에서 시작된다.하지만 갈랑갈과 레몬그라스는 단지 향신료가 아니다. 역사와 약용, 종교와 무역이 얽힌 재료이며, 동남아 문화의 뿌리이자 그 땅의 지혜를 품은 식물들이다.---1. 갈랑갈: 생강의 사촌인가, 완전히 다른 존재인가갈랑갈은 생김새가 생강과 매우 비슷하다. 둥글고 매듭진 뿌..

제4장. 잎사귀 하나에도 사연이 있다: 카피르라임잎과 바나나잎

동남아 음식에는 종종 나뭇잎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단순히 장식이나 포장이 아니라, 조리의 일부로 작용하고, 향을 부여하며, 때로는 문화적 상징으로까지 확장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카피르라임잎(Kaffir lime leaves)**과 **바나나잎(Banana leaf)**이다. 이 두 잎사귀는 동남아 음식에서 결코 대체될 수 없는 독특한 존재로 기능한다.1. 향이 맛을 이끄는 잎: 카피르라임잎의 비밀카피르라임잎은 동남아의 커리나 볶음요리, 샐러드, 심지어 디저트에까지 널리 쓰인다. 이중잎 구조로 이루어진 이 잎은 조리 중에 넣으면 은은하고 상큼한 향이 배어들며, 요리 후반에 넣으면 신선한 향이 그대로 남는다. 단맛, 짠맛, 매운맛 사이를 조화롭게 연결해주는 이 잎은, 향 자체가 ‘맛의 한 축’이 된다..

제3장. 바다의 젖: 피쉬소스의 대륙별 분화사

피쉬소스는 동남아 요리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연상되는 재료 중 하나다. 누군가에게는 강렬한 냄새로 인식되지만, 동남아 사람들에게는 **국물의 깊이, 볶음의 감칠맛, 샐러드의 완성도를 좌우하는 ‘생명수’**와도 같다. 이 액체는 단순한 조미료가 아니라, 동남아인의 혀에 새겨진 문화이자 역사다.그런데 이 액젓, 피쉬소스는 비단 동남아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탈리아의 가룸(garum), 한국의 젓갈, 중국의 어장(魚醬)**까지, 발효된 생선 소스는 고대부터 다양한 문명에서 존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남아의 피쉬소스가 특별한 이유는, 지속성과 보편성, 그리고 식문화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1. 고대 동남아의 어장과 발효 기술피쉬소스의 시작은 분명 ‘생선의 풍요’였다. 메콩강, 이라와디..

제2장. 생태와 기후가 낳은 재료의 천국

동남아시아를 이루는 수많은 국가들—태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미얀마, 캄보디아, 라오스 등—은 각기 다른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있지만, 공통적으로 갖는 지리적 조건이 있다. 바로 열대 몬순 기후, 다도해 및 반도 지형, 고온다습한 환경, 그리고 폭넓은 생물 다양성이다.이 지역은 일 년 내내 기온이 높고, 비가 풍부하며, 강과 바다가 가까이 있다. 농작물은 한 해에 두세 번씩 수확할 수 있고, 습기와 열이 조화를 이루며 발효와 숙성, 훈연, 태양 건조와 같은 저장 방식이 자연스럽게 발달했다. 동남아 특유의 재료들은 바로 이 기후와 생태의 산물이다.1. 바다와 강, 그리고 발효의 문명동남아 대부분의 주요 도시는 강 하구나 해안에 위치해 있다. 하노이와 사이공은 메콩강을 끼고 있고, 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