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 나라별 맥주와 다섯끼의 식사 7

맥주의 빛깔로 기억하는 미얀마 – Myanmar Beer와 다섯 번의 식사

황금탑 아래, 한 잔의 맥주로부터양곤 공항에 내린 첫날 밤, 나는 샨 국수보다 먼저 Myanmar Beer를 마셨다.노란색 라벨과 초록빛 병, 강한 탄산과 묵직한 바디감이 입안에서 폭발하듯 튀었다.익숙한 라거보다는 약간 더 진하고, 독일식 맥주의 절제된 쌉쌀함과도 닮아 있었다.무더운 저녁의 땀이 식어가는 그 순간, 이 맥주는 마치 기름에 찌든 하루를 정화해주는 약 같았다.Myanmar Beer는 미얀마의 맥주이자, 미얀마인의 일상이다.1995년 국영 맥주 공장에서 출발하여, 이후 민영화와 합작을 거쳐 탄생한 이 맥주는독일 기술을 기반으로 양조된 진한 바디감과 적당한 탄산, 그리고 쓴맛보다는 고소함이 강조된 맛으로현지인들은 물론 외국인에게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맥주를 파는 방식도 다양하다.플라스틱 테이블..

도시의 온도, 거품의 기억 – 타이거 맥주와 싱가포르의 다섯 번 식사

싱가포르는 작다. 하지만 그 작음 속에 아시아 전체가 녹아 있다. 말레이계의 향신료, 중국계의 국물, 인도계의 향, 페라나칸의 섬세함까지. 이 도시국가는 거대한 대륙의 입맛을 압축해놓은 미각의 실험실이었다. 그런 다양성 속에서 한 가지 공통된 배경음을 찾아본다면, 바로 **타이거 맥주(Tiger Beer)**다. 어디서나 발견되며, 무엇과도 잘 어울리는 이 맥주는 싱가포르를 마시는 듯한 느낌을 준다.타이거 맥주는 1932년, 싱가포르 최초의 지역 맥주로 탄생했다.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싱가포르에서, 동남아의 더운 기후에 맞춘 청량하고 상쾌한 맥주를 만들기 위해 설립된 Malayan Breweries Limited에서 시작되었고, 지금은 하이네켄 그룹 산하의 아시아 퍼시픽 브루어리(Asia Pacific ..

코코넛과 열대의 거품 – 인도네시아의 빈탕 맥주와 다섯 번의 식사

인도네시아는 흔히 수천 개의 섬으로 구성된 나라라고 소개된다. 하지만 그 말은 절반의 진실일 뿐이다. 이 나라는 섬의 숫자보다 더 많은 향신료, 더 다양한 음식, 그리고 믿기 힘든 만큼 뚜렷한 지역색을 가지고 있다. 자카르타에서 발리까지, 욕야카르타에서 반둥까지, 같은 나라지만 마치 다른 세계처럼 느껴지는 땅. 그리고 이 복잡하고 유연한 땅에서, 나는 한 가지 공통된 이름을 찾게 되었다. 빈탕(Bintang). 인도네시아 어디서든 쉽게 만날 수 있는 금빛 병맥주, 별이라는 이름의 이 맥주는 내게 이국의 테이블에 앉았다는 실감을 선사했다.처음 빈탕을 마신 건 발리였다. 저녁 여섯 시, 짧은 소나기가 지나가고 무지개가 반짝이던 해변가 바에서였다. 맥주는 시원했고, 옆자리의 외국인은 맥주를 '이 나라의 물보다..

안개의 땅, 열대의 술 – 말레이시아에서 마신 칼스버그와 다섯 번의 식사

"단맛 뒤엔 늘 매운맛이 있고, 매운맛 뒤엔 시원한 맥주가 있다"말레이시아는 참으로 이질적인 나라였다. 쿠알라룸푸르의 하이웨이 옆에 늘어선 모스크, 그 옆의 차이나타운, 그리고 다시 그 너머에 보이는 힌두 사원들. 이슬람이 공기처럼 감도는 나라에서 맥주 이야기를 꺼낸다는 것은 어쩌면 조심스러운 일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말레이시아만큼 맥주와 음식이 서로를 돋보이게 하는 나라도 드물다.수많은 민족과 종교, 문화가 혼재한 이곳에서 식탁은 늘 다양한 언어를 말한다. 나시 르막을 먹고 나면 입 안에 코코넛 밀크가 맴돌고, 락사를 마시면 매운 생선국물에 땀이 맺힌다. 그리고 그 모든 걸 부드럽게 넘기는 한 모금, 칼스버그 맥주는 바로 그 순간을 위한 존재다.내가 말레이시아에서 칼스버그를 처음 마신 건 조호르 바루..

파도와 불빛 사이 – 필리핀에서 마신 산 미구엘과 다섯 가지 식사의 기억

“천천히 마셔라, 여기는 필리핀이니까”필리핀에 처음 갔을 때, 나는 너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현장을 오가며, 때론 비행기를 두 번 타기도 했다. 마닐라의 교통 체증은 내 성격을 시험했으며, 5분이면 될 일은 늘 1시간이 걸렸다. 그러던 어느 날, 함께 일하던 현지 직원이 말했다."천천히 마셔라. 여기는 필리핀이니까."그 말은 단순히 술을 마시는 방식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말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게 된 건, 한 병의 산 미구엘 맥주를 들고 보홀 해변의 저녁 노을을 바라보던 순간이었다.필리핀의 맥주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다. 그것은 기다림의 문화 속에서, 사람들과의 거리 사이에서, 혹은 예기치 못한 변수 앞에서 마음을 가볍게 만들어주는 도구였다...

바람 속의 한 모금 – 태국에서 마신 맥주와 음식의 이야기

“땀을 닦는 게 아니라, 삶을 마시는 방식”태국에 처음 도착했을 때 느낀 것은 공기가 무겁다는 것이었다. 방콕의 하늘은 푸르다기보다 뿌연 햇살로 가득했고, 거리의 열기는 자동차 매연과 튀김 기름 냄새, 향신료의 자극이 뒤엉켜 체온보다도 더 뜨겁게 달궈져 있었다. 이 땅에선 그 무엇도 차가울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생각은 첫 날 밤, ‘싱하 맥주’를 한 모금 마시는 순간 완전히 바뀌었다.길거리 포장마차 옆, 흰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태국인들과 함께 치앙마이 스타일 돼지구이를 먹으며 병째로 들이킨 그 맥주는, 마치 쏟아지는 스콜 속에서 우산 없이 서 있는 느낌이었다. 시원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몸이 식었다. 그리고 머리까지 맑아졌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태국 사람들은 땀을 닦는 게 아니라, 맥..

“햇빛 아래, 맥주에 밥을 말다 – 베트남에서 배운 시원한 식탁”

베트남의 낮은 ‘한여름’이라는 단어로는 부족하다.사이공 거리 위로 오토바이 1천 대가 쉴 새 없이 내뿜는 열기,햇볕은 바닥을 구워 내 신발 바닥이 미세하게 휘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그런 날, 사람들은 그늘도 아닌 길가 플라스틱 의자 위에서 맥주를 마신다.내가 베트남에서 처음 333맥주를 마신 건, 그런 날이었다.아무 계획도 없이, 우연히 들어간 호찌민 3군의 허름한 맥주집.에어컨도 없이 선풍기만 돌고 있었지만, 맥주캔에서 뚜껑이 ‘탁’ 하고 열리는 순간몸 속에 감춰져 있던 갈증이 동시에 튀어나왔다.차갑고 가볍고, 이상하리만치 잘 넘어가는 333 맥주.그 옆엔 지글지글 구워진 고기와 쌈채소,그리고 고수 향이 확 끼쳐오는 쌀국수와 볶음 요리가 하나둘 올라오기 시작했다.그렇게 나는 알게 됐다.이 나라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