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닐라의 아침, 거리에는 마늘 볶음밥 냄새가 퍼지고, 주방에서는 작은 팬에서 무언가 지글거린다. 바로 Tocino, 필리핀 사람들이 사랑하는 달콤한 돼지고기다.
현지 지인의 집에 초대받아 처음 맛본 그날, 나는 그 특유의 향기에 놀랐다. 설탕과 파인애플 주스로 재운 고기는 살짝 탄 듯한 겉면과 부드러운 속살을 동시에 품고 있었고, 마늘 볶음밥, 반숙 계란, 식초 소스를 곁들인 ‘Tosilog’ 한 접시는 아침부터 입맛을 깨웠다.
달콤한데 느끼하지 않고, 고기인데 부담스럽지 않은 이 아침은 마치 필리핀의 정서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했다.
Arroz Caldo – 병든 몸도, 지친 마음도 안아주는 닭죽 한 그릇
비 오는 마닐라의 오후, 몸이 으슬으슬했던 날, 지인이 “이럴 땐 Arroz Caldo지”라며 데려간 곳은 작은 분식집이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죽 위에 튀긴 마늘과 파, 삶은 달걀이 얹혀 있었고, 테이블 한편엔 칼라만시가 놓여 있었다. 한 숟갈 떠 넣는 순간 생강의 따뜻함과 닭고기의 부드러움이 속을 감싸 안았고, 칼라만시를 짜 넣자 상큼한 향이 피어올랐다.
그날 나는 몸도, 마음도 함께 풀렸다. 그리고 이해했다. 왜 필리핀 사람들은 병이 들면, 혹은 힘든 날엔 이 죽을 찾는지.
Taho – 골목 끝에서 만난 아침의 달콤한 인사
새벽, 마카티의 게스트하우스에 묵던 어느 날. “타호~!” 하고 외치며 골목을 도는 노점상의 목소리에 잠에서 깼다.
호기심에 나가보니 한 손엔 통 연두부, 다른 손엔 검은 시럽과 타피오카 펄이 담긴 용기를 들고 있었다. 그는 조용히 컵에 연두부를 떠 담고, 시럽을 뿌린 뒤, 타피오카를 얹어 건넸다.
숟가락으로 퍼먹는 그 부드러움, 흑설탕의 달콤함, 쫄깃한 타피오카. 소박하지만 따뜻하고 친절한 아침이 Taho였다.
Pinakbet – 짠맛 속에 깃든 시골 식탁의 풍경
루손 북부의 일로코스 지방. 친척 집에서의 저녁 식사에 등장한 반찬은 다양한 야채가 소스 없이 볶아진 듯한 접시였다.
가지, 박, 오크라, 고추, 말린 생선이 한데 어우러진 이 음식이 바로 Pinakbet이었다. 짭조름하고 구수한 맛이 강렬했고, 밥 없이 먹기에는 무리가 있을 정도였지만, 먹다 보니 채소 본연의 맛이 살아 있고, 입에 익어갔다.
그 지역 사람들의 삶과 입맛, 밥상 문화를 가장 솔직하게 보여주는 음식이었다.
Turon – 바삭한 소리 속에 숨어 있는 단순한 행복
시장 구석 작은 튀김 노점. 아이들 뒤를 따라가 보니 손에 들린 건 바삭바삭한 롤. 설탕에 절인 바나나를 얇은 반죽에 싸서 튀긴 Turon이었다.
갓 튀긴 롤을 받아 들고 한 입 베어무니, 단맛과 함께 뜨거운 과즙이 퍼졌다. 겉은 설탕이 캐러멜처럼 눌어붙어 바삭했고, 속은 부드럽고 촉촉했다.
이보다 더 단순하면서 확실한 행복이 있을까. 필리핀의 오후, 그 달콤하고 바삭한 한 입은 여행의 또 다른 기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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