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닐라에서 북쪽으로 몇 시간, 팜팡가 지방의 수도 앙헬레스 시티에 도착했을 때, 나는 단 하나의 음식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 이름은 ‘Sisig(시시그)’. 필리핀식 술안주라지만, 단순히 그걸로 정의할 수 없는 깊은 맛의 요리.
길거리에 들어서자마자 코끝을 때리는 향. 불판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찢긴 고기들의 기름 튐 소리. 그리고 그 위에 깨지듯 놓이는 날계란 하나.
나는 ‘Aling Lucing’이라는 작은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Sisig의 발상지라고 불리는 이곳에서, 나는 첫 시식을 경험하게 되었다.
머릿살, 귀, 간까지… 돼지의 모든 것을 바삭하게
Sisig은 돼지 머릿살, 귀, 때론 간까지 잘게 다져 만든 요리다. 원래는 버려지던 부위를 활용하던 것이, 지금은 필리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철판 요리가 된 것이다.
재료를 삶고, 굽고, 다지고, 양파와 고추를 섞어 볶아낸 뒤, 마지막엔 철판 위에서 날계란과 함께 바글바글 끓여낸다. 주문과 동시에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등장하는 그 철판 한 접시는 시각과 청각을 동시에 자극했다.
첫 숟가락. 겉은 바삭하고, 안은 부드럽다. 고소함과 짭짤함, 그리고 간혹 나타나는 간 특유의 향까지. 여기에 레몬처럼 상큼한 칼라만시를 짜 넣으니, 그 복잡함이 하나로 정리되었다.
술이 절로 당기는 맛이라는 말, 이때 처음 이해했다. 하지만 나는 술 없이도 충분히 취했다. 맛에.
필리핀의 '안주' 문화, 그 중심에서
Sisig은 보통 ‘Pulutan(술안주)’로 분류된다. 삼겹살처럼 메인보단 곁가지로 여겨지지만, 그 어떤 음식보다 기억에 오래 남는다.
필리핀 사람들은 금요일 밤이 되면 친구들과 함께 맥주 한 병과 Sisig 한 접시를 나누며 하루를 푼다. 철판을 앞에 두고, 땀이 송골송골 맺힐 때까지 먹고 마시고 웃는다.
이 음식엔 그런 순간의 감정이 담겨 있다. 일상 속 짧은 휴식, 허락된 기분 좋은 무질서. 그것이 Sisig이다.
Aling Lucing, 그리고 거리로 퍼져나간 철판의 전설
Aling Lucing은 1970년대 후반, 돼지 머리를 활용해 다진 고기 요리를 철판에 올려 내며 ‘현대 Sisig’의 원형을 만들었다고 알려진다. 지금도 그녀의 이름은 이 음식과 함께 불리며, 앙헬레스에선 일종의 성지처럼 여겨진다.
그 이후 Sisig은 전국으로 퍼졌고, 마닐라에선 패스트푸드에서도 팔리고, 해외 필리핀 식당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현재는 버터, 마요네즈, 치즈, 심지어 퓨전식으로 계란 프라이 대신 크림소스를 얹은 ‘모던 시시그’도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진짜 맛은 여전히 철판과 기름, 그리고 바삭한 돼지고기 안에 있다.
바삭함 속의 깊은 기억
그날, 철판이 식어갈 무렵 나는 여전히 마지막 한 조각을 아껴 먹고 있었다. 친구는 맥주를 마시며 웃었고, 나는 손가락으로 철판의 가장자리 바삭한 부분을 긁어냈다. 거기에 가장 진한 맛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Sisig은 내게 그저 술안주가 아니라, 필리핀이 가진 절약과 창의성, 그리고 함께하는 삶의 방식 그 자체였다. 소박하지만 깊은 음식. 허름하지만 잊히지 않는 기억.
나는 지금도, 시끄럽고 붐비는 골목을 떠올린다. 그 안에서 철판 위에 튀어 오르던 소리. 그것이 바로 Sisig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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