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솥 안에서 피가 끓는다.
그건 잔인함이 아니라, 기억이다.
검은색 국물 속에 부드러운 돼지고기, 오독오독 씹히는 내장들, 그리고 진한 식초의 산미가 퍼지며 입안의 용기를 시험한다.
이 요리는 필리핀의 전통 음식 중에서도 가장 도전적인 동시에 가장 깊은 위로를 주는 한 그릇, **디누구안(Dinuguan)**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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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nuguan이란?
‘Dinuguan’은 필리핀어로 **"피로 요리된 것"**이라는 뜻이다. ‘Dugo’는 피를 뜻하고, ‘-an’은 어떤 것으로 만들어진 요리를 의미하는 접미사다.
즉, Dinuguan은 돼지의 피와 고기, 내장 등을 주재료로 만든 진한 스튜다.
식초로 비린 맛을 잡고, 마늘, 양파, 칠리로 풍미를 더하며, 진하게 졸인 블랙 소스가 그릇을 깊게 물들인다.
이 음식은 종종 **푸토(Puto)**라고 불리는 필리핀식 찐 쌀 케이크와 함께 제공되는데, 달콤하고 부드러운 푸토가 디누구안의 짭짤하고 진한 맛을 중화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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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유래: 식민지 이전부터 이어진 절약의 철학
디누구안의 뿌리는 스페인 식민지 이전의 토착 필리핀 문화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기를 소중히 여기던 당시 사람들은 동물을 잡으면 머리, 피, 내장까지 전부 활용했다. 이 요리는 잔재물 없는 조리 철학의 결정체였다.
필리핀 각지에서 유사한 피 요리가 존재했지만, 디누구안은 그중에서도 가장 보편화된 형태로 자리 잡았다. 스페인 식민 시대 이후에는 모렐리아(Morcilla) 같은 유럽식 선지 요리와 비교되며, 필리핀 고유 요리로 더욱 강조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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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별 이름과 변형
필리핀 전역에서 사랑받는 음식이지만, 지역마다 이름과 스타일이 다르다.
일로코스(Ilocos): "Dinardaraan" — 식초 향이 더욱 강하고, 국물이 진득하게 졸여져 나온다.
카팜팡가(Kapampangan): 간혹 돼지 간이나 염통까지 넣어 더 깊은 맛을 낸다.
비사야(Visayas): 내장보다는 돼지고기 중심, 칠리 사용이 더 강하다.
루손(Luzon) 남부 지역: 푸토와 함께 먹는 문화가 뚜렷하다.
이처럼 디누구안은 지역의 재료, 입맛, 기후에 따라 다양하게 변형되며, 필리핀의 음식 유연성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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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료 구성
주재료: 돼지 피, 삼겹살 또는 볼살, 돼지 간이나 내장
부재료: 마늘, 양파, 식초, 물, 칠리, 베이 리프, 간장 또는 새우젓
조미료: 소금, 후추, 설탕 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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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리 방식
1. 피 준비: 잡은 지 얼마 안 된 신선한 돼지 피에 약간의 식초나 소금을 섞어 굳지 않게 보관한다.
2. 고기 손질: 돼지고기와 내장을 깨끗이 씻고 적당한 크기로 썬다.
3. 볶기: 팬에 마늘과 양파를 볶고, 고기와 내장을 넣어 익힌다.
4. 졸이기: 식초와 물을 넣고 끓인 뒤, 피를 부어 중약불에서 천천히 졸인다.
5. 간 맞추기: 간장 또는 새우젓으로 간을 맞추고, 칠리와 후추로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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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누구안을 둘러싼 문화적 태도
디누구안은 필리핀 내에서도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음식이다.
어떤 이들은 ‘비위 상한다’며 멀리하지만, 다른 이들은 **“진정한 필리핀의 맛은 디누구안에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이 음식은 가난과 지혜의 산물이었고, 자원을 아끼는 방식이자, 죽은 생명을 존중하는 태도의 표현이기도 하다.
오늘날에는 대중 식당이나 마트에서도 손쉽게 구할 수 있을 정도로 일상화되었지만, 가정에서 어머니나 할머니가 직접 끓여주는 디누구안은 다른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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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토와의 환상적 궁합
디누구안은 혼자 나오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 Puto와 함께 나온다.
Puto는 찹쌀가루나 쌀가루에 설탕, 베이킹 파우더, 코코넛 밀크를 섞어 찐 필리핀식 쌀 케이크다.
디누구안의 진한 맛을 중화해주는 달콤함
국물에 푸토를 찍어 먹으면 마치 ‘밥 없는 스튜’의 허전함을 채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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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교민 사회에서의 디누구안
필리핀 교민 사회에서도 디누구안은 특별하다.
미국, 캐나다, 중동 등지의 필리핀 마켓에서는 디누구안을 진공포장하거나 캔으로 판매하며, 고향을 떠난 이들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음식으로 자리매김했다.
어떤 이들은 친구에게 권할 수 있는 음식은 아니라고 말하지만, 다른 이들은 이 독특한 블랙 스튜를 자랑스럽게 내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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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피의 스튜는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이다
디누구안을 처음 접하는 사람은 흔히 망설인다. 하지만 그것은 '피' 때문이 아니다.
사실 그 속에는 한 민족이 가진 절약의 지혜와 식재료에 대한 존중, 그리고 공동체가 함께 나누는 음식에 대한 믿음이 담겨 있다.
한 그릇의 디누구안에는 필리핀 사람들의 용기, 정성, 가족애가 깊게 배어 있다.
이 검고 진한 스튜는, 오늘도 누군가의 식탁 위에서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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